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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30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3)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즐거운 책 이야기 2011.01.30 01:51 Posted by 아일레프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10점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민음사

이 소설을 읽고 나니 기존의 어떤 소설도 주지 못한 혼돈과 슬픔으로 머리 속이 어질 어질 해졌다. 기존에 머리 속에 차분히 정리되었던 물음표들이 다시 고개를 들어 날 괴롭힌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아이러니와 도덕적 딜레마로 가득찬 불투명한 회색지대라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 중 하나라고 한다면 이 소설은 과연 그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이전에 블로그에 올린 바 있는 소설 "수난"과 한번 비교해보겠다. 작가는 이 '수난'이란 책을 통해 옳음과 그름, 선과 악에 대해 묻고 있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어떤 인물들이 '선'의 편에 있는지, '악'의 편에 있는지 굉장히 자연스러이 쉽게 구분할 수 있고 그것으로 인물들에 대한 호불호가 완전히 갈리게 된다. 수난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스키가 물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작가는 우리가 다른 질문에 대답하길 원한다. "넌 지금 이 현실 속에서 어느 편에 있니?" 라고. 끊임 없이 들려오는 이 질문이 가슴을 꽤나 괴롭힌다. 그렇게 괴롭혀진 가슴은 마지막 장을 덮는 즉시 부글 부글 끓어 오르게 되고, 나만은 이 세상에서 선의 편에 서야 한다고 굳은 결심을 하게끔 만든다. 당장 거리로 나가 짱돌을 들어 이 더러운 세상의 시스템에 집어 던지고 싶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달랐다.

사실 이 소설이 뻔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름다운 아프리카 부족의 풍경을 보여주겠지. 자연과 함께 숨쉬며 공존하는 삶, 무엇인가를 파괴함으로써 얻어지는ㅡ 그것에 인한 반대급부로 얻어지는 뒤끝이 찝찝한 행복이 아닌 '뭔가 진짜 행복'이라 부를 수 있는 그런 삶과 풍경을 보여주겠지. 그러나 그 행복은 서방의 하얀 마귀들에게 짖밟히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확보하게 된 감정으로 그들을 좀 더 미워할 수 있게 되겠지.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작가는 그들의 행복한 모습을 주목해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소설의 분위기는 서방의 하얀 마귀가 오기 한참 전인데도 어둡고 침침했다. 자신이 힘겹게 얻은 강자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 애쓰는 주인공 오콩코의 조급한 모습은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각개약진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으며 그의 성에 차지 않는 그의 아들 은워예의 모습은 마치 나 자신을 보는듯 측은했다. 그들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의 변덕과 예측 할 수 없는 삶의 모습들을 종교와 주술로 풀어나가는 모습들도 내 눈에는 예쁘게 보여지지 않았다. 그들의 삶은 완벽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토피아의 아주 작은 일부라도 발견하고픈 내 욕심과 기대감은 전혀 충족되지 못했다. 쌍둥이가 태어난 것은 대지의 여신에 대한 모독이므로 내다 버려야하는 사회, 다른 부족의 죗값으로 얻었던 이케메푸나, 어느새 오콩코의 아들이 되어주었으며 은워예의 형이 되어주었던 이케메푸나를 죽이라 명하는 숲과 동굴의 신이 지배하는 사회. 그리고 그 이케메푸나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버리는 주인공 오콩코. 내가 이것을 어떻게 예쁘게 봐줄 수 있단 말인가? 당혹스러웠다. 이건 내가 기대했던 풍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처럼 그 곳에도 역시나 전통란 단어의 긍정적 이미지로 덮어버릴 수 없는 사회적 모순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 미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당연스럽게 변화와 '진보'라는 단어를 갈망하듯이 그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곳은 에덴이 아니었다. 인간이 자리를 차지한 땅에 에덴이 자리잡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리고 침략자들은 이런 균열을 반가워 하며 그들에게 살짝 문을 열어 더 나은 세계를 맛보여준다.

백인 선교사가 그들의 종교를 들고 왔을때 몇몇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를 반기며 그 종교를 맞이 했다. 고통을 참으며 아이를 낳았지만 쌍둥이 이기에 버릴 수 밖에 없었던 가련한 여인, '오수'라 불리는 하층민들이 백인의 종교에 흡수되었고, ... 주인공 오콩코의 아들도 부족의 신을 버렸다. 그리고 부족의 지도자 중 한 사람도 그 길을 택하고 말았다. 부족은 처음에 그 종교와 공존을 선택했지만 결국은 깨지고야 말 부대낌이었다. 그들은 몰랐다. 백인이 믿는 신에서 탄생된 종교들은 무한한 사랑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한편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메시지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것을. 들어올 때는 사랑의 얼굴을 보여주지만 어느새 자리를 잡으면 반대편 얼굴을 보인다. 그리고 그 때는 늦었다. 백인의 종교를 뒤에서 조종하는 것이 그들의 신이 아닌 열강이란 것을 알아차린 그 때는 이미 늦었다.

아무일이 없었다는 듯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드넓은 하늘을 날아본 독수리는 노동 없이 먹이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새장 안에서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들도 마찬가지다. 선교사들이 보여준 밝음을 본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한번 생긴 균열은 그 범위를 계속 넓혀가고 인간의 힘으로는 그것을 메우기 어렵다.

카잔차스키의 "수난"에서 난 이 질문을 끄집어 냈다. "질서의 수호인가 사랑과 정의인가" 그때는 대답하기 쉬웠다. "수난"에서 혼돈의 여지는 없다. "질서의 수호"란 편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악하고 비열하다. 카잔차스키는 질서의 편에 서있는 자들의 상황을 배려심 있게 쓰지 않았다. 이 책은 어떤가? "전통이냐 진보냐"라는 질문을 끄집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전통 대신 보수란 말이 더 적당할 것도 같지만 한국에서 저 '보수'란 단어에 원치않게 추가된 부정적 어감을 생각해 볼때 적당하지 못해 전통을 선택했다.) 둘다 빛이 있고 어둠이 있다. "전통"이라고 말하기에는 그들의 무지로 인해 희생당하는 쌍둥이 들이 마음에 걸리며 "진보"라 말하기엔 그들에게 진보의 메시지를 가르쳐주는 교회 뒤의 하얀 마귀들이 걸린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다. 다만 이 아프리카의 땅에 존재하는 개인으로서 슬퍼하고 운명의 신을 저주하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밖에. 부족의 전통안에서 강자로 우뚝 서고 싶었던 오콩코는 그의 꿈을 펼칠 무대 자체가 사라지자 자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죽음과 그들을 함께 묶어 두었던 매듭에 백인이 쑤신 칼집이 들어가자 그들의 모든것이 부서지는 광경을 보며 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질문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전통이냐 진보냐" 이런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것은 사치이다. 다만 애도할 수 밖에. 그들을 이렇게 패배하게 만들었던 이 가혹한 운명의 땅과 시간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눈을 감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 글을 쓴 치누아 아체베는 기독교인이라 한다. 그가 기독교인의 교리를 받아들였다면 그는 나이지리아 기존의 신앙을 버린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는 이 소설을 쓰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신의 땅에 지워진 이 가혹한 역사의 한 부분을 이렇게 가감없이 보여준 그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이 소설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 눈물을 재료로 쓰여진 책인 것이다.

그 눈물의 결실에 깊이 감사한다. 당신 덕에 난 가슴 저미는 이야기를 알게되었다. 고맙다. 하지만 당신의 이 다음 책 "더 이상 평안은 없다"는 읽지 않을 것이다. 가슴 저미는 아픔의 감정은 이것으로 족하다. 더는 알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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