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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책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29건

  1. 2014.08.08 뼈의 소리 - 이와아키 히토시
  2. 2014.08.05 과학이란 무엇인가 - 파인만
  3. 2013.11.17 플루토크라트 - 난 슈퍼스타를 원하지 않아!
  4. 2013.11.12 무리한 설정이 어떻게 소설을 망치는가 -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제3인류 (6)
  5. 2013.04.07 착하고 온순한 나를 화나게 만든 책,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 (4)
  6. 2012.06.25 6월 4째주 독서노트 - 에덴의 용, 의식 (1)
  7. 2012.06.14 6월 셋째주 독서 노트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토마스 만
  8. 2012.06.08 6월 첫째주 독서노트
  9. 2012.01.27 체리신드롬, 금기는 즐거움이 된다. (8)
  10. 2011.03.01 [책리뷰]보살예수 (5)
  11. 2011.02.01 베가본드
  12. 2011.01.30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3)
  13. 2011.01.18 파이 이야기
  14. 2010.12.19 낙타의 삶을 벗어나 - 재현이란 무엇인가
  15. 2010.08.11 인간의 굴레에서 (5)
  16. 2010.08.04 에덴의 동쪽
  17. 2010.05.30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수난 - 다시 못 박힌 예수 (2)
  18. 2010.05.25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바가바드 기타'의 서문 중에서
  19. 2010.03.30 GBlog 3호 나오다~
  20. 2010.02.23 안톤 체호프 - 6호 병동
  21. 2010.02.10 아쉽고, 아쉽다. -- 예수 충격 (2)
  22. 2010.02.10 대화를 하자고, 불가사의한 소년 - 소크라테스편 (6)
  23. 2009.12.24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은 그들의 대화 -2 (2)
  24. 2009.12.16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은 그들의 대화 -1
  25. 2009.11.30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고
  26. 2009.10.07 당신에게 책 읽기란 무엇입니까?
  27. 2009.07.22 역의 역 --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읽고 (4)
  28. 2009.06.09 갬블시티
  29. 2009.05.28 나라가 불탄다

뼈의 소리 - 이와아키 히토시

즐거운 책 이야기 2014.08.08 20:59 Posted by 아일레프

뼈의 소리

이와아키 히토시 지음 | 김완 옮김
애니북스 2006.08.16
펑점

  생애 최고의 만화 '기생수' 작가 - 이와아키 히토시의 초기 단편집 '뼈의 소리' 읽었다짧은 7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책은  개의 단편을 제외하면 일관되게 '인간의 조건' 관해 묻고 있다.

 

연민을 느끼지 않는 인간을 인간이라   있는가?

슬픔을 느끼지 않고눈물을 흘릴  없는 인간을 인간이라 부를  있는가?

 

 대상이 타자라면 그를 싸이코패스소시오패스라고 말하며 넘길  있겠지만만약 스스로가 그렇게 감정이 말소된 사람이라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나그런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있을까?

 

 질문에 관심이 있다면 히토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질문에 대한 그의 응답이 무엇인지  기울여 보자거친 그림체와우울한 서사가 책을 지배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크게 뭉클해잠시나마 요동침을 느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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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란 무엇인가 - 파인만

즐거운 책 이야기 2014.08.05 18:36 Posted by 아일레프

파인만의 과학이란 무엇인가?10점

 















http://illef.tistory.com2014-08-05T09:35:400.31010

저명한 파인만이 쓴 "과학이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얇은 책이고, 파인만의 강의를 책으로 옮긴 것이기에 한장 한장이 쉽게 넘어간다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하지만 강연을 책으로 옮겼기 때문에 간혹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점과 그의 논거를 뒷받침 하는 예가 필요 이상으로 많이 나와 얇은 책을 더 얇게 만들었다는 점은 날 아쉽게 했다.  

자, 과학이란 무엇인가? 파인만은 이 과학을 3가지 항목으로 분류한다. 새로운 사실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방법론과 그때의 사고의 흐름을 과학이라 볼 수 있으며 둘째로 관찰을 바탕으로 특정 규칙을 끄집어내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그 규칙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술을 발명하는 것. 이 3가지가 그가 생각하는 과학이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첫 번째 사항이다. 새로운 사실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방법론, 과학적 규칙을 이끌어 내기 위한 사고의 흐름, 그 자체가 과학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파인만은 이것에 대해서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해 설명한다. 이것은 파악되고 설명된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과학자에게 법칙이란 다시 반박당하고 다시 설명되어야 할 사실에 불과하다. 파인만은 이것을 과학의 불확실성이라 설명한다. 그렇다.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규칙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과학의 두 번째 성질은 관찰한 사실을 바탕으로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것을 나타내더라도 좋은 규칙과 더 좋은 규칙이 있다. 누군가 태양을 관찰했다고 해보자. 그리고 이런 규칙을 만들었다. "태양은 지구보다 크다." 이것은 훌륭한 규칙이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보자. "태양의 크기는 지구보다 크며 그 크기의 차는 109배이다." 어떤가? 이는 전자보다 더욱 훌륭한 규칙이다. 왜냐면 첫째로, 이것은 이전 규칙보다 더 명확히 태양이 지구보다 얼마나 큰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것은 전자보다 더 반박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첫 번째 규칙은 태양이 지구보다 크기가 같거나 작다는 사실이 발견될 때만 반박된다. 하지만 두번째 규칙은 "그 크기의 차이가 110배이다"라는 반박에도 열려 있다. 이것은 놀랍도록 재미있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명확하고 정밀한 규칙일수록 반박당하기 쉽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같은 관찰에 대한 규칙의 우열의 재는 가늠자이다. 

규칙이 반박되는 것은 언제인가? 그것은 규칙의 예외가 발견될 때이다. 이미 정한 규칙에 예외 상황이 생겼을 때 과학자는 이 예외 상황을 포괄하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이 예외가 발견될 때마다 규칙이 더 복잡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간단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천동설을 예로 들어보자. 천동설이 가능하게 하도록, 그리고 그것이 사실임을 알리기 위해 천동설은 수많은 법칙으로 둘러싸여 있었다.(아닌 것을 사실로 꾸며내려면 정말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하지만 지동설이 나오고 그 규칙은 몇 배로 감소했다. 그리고 케플러가 행성이 타원으로 돈다는 아이디어를 꺼내자 그 규칙은 또 다시 몇 배 감소했다. 이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다. 많은 예외를 포함하는 새롭고도 정교한 규칙이 오히려 이전 규칙보다 더 간단할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기하다. (케플러가 얼마나 기뻐했을지 그 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프로그램을 만든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고객의 요구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 기능이 추가될 때마다 프로그램은 지저분해지고 점점 크기를 늘려간다. 그러나 언젠가 마음을 먹고 처음부터 다시! 라는 마음을 먹고 모든 요구를 관통할 수 있게 규칙을 정립하고 프로그램의 구조를 다시 잡는 순간, 프로그램은 작아지면서 오히려 모든 요구를 만족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되게 된다. 단조로움이 오히려 복잡함보다 더 많은 것을 포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롭다. 

파인만은 발견된 규칙을 응용해 새로운 것을 발명할 수 있게끔 하는 기술 역시 과학이라 불렀다. 여기선 기술, 그리고 과학 그 자체보다 다른 부분의 이슈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과학자의 책임이다. 신기한 일이지만 과학자가 발견하고 발명한 그것은 선과 악의 중립지대에 있다. 파인만은 과학이 발명하는 것은 결코 선과 악 중 하나가 아니라고,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바로 당신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살짝 비켜선다. (파인만은 핵폭탄 프로젝트, 맨하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과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고개가 갸웃할 수 밖에 없다. 자신이 만든 발명품이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이끌었음을 알면서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조금 놀랍다. 난 과학자는 어떤것을 발명하면서 이것이 어떻게 쓰일 수 있을지, 그리고 만약 어떤 방법으로 쓰여선 안 되는 지를 명확히 생각하고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몇 과학자들은 기술 자체는 더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어디로 갈지에 대해선 무지한 '척'한다. 이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마쳐보자. 파인만이 살던 시대보다 지금은 더욱 과학의 시대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은 대부분 과학이 가져다준 진보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과학이 만든 기술이지만 우리가 사는 삶의 태도는 과학적이지 않다. 우리는 빨리 믿기 좋아하고 이미 믿은 그것의 예외가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가졌던 믿음을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 우린 과학적 시대에 비과학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진실이라 믿고 있는 사실이 언제든지 반박 가능해질 수 있음을 깊이 알자. 성숙과 더 많은 이해는 늘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닌 것한테서 오니까. 그렇게 인류는 진보해 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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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때 모든 동네엔 하나쯤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찾기 힘들다. 대여점을 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야. YouTube를 통해 왠만한 동영상을 볼 수 있고, 영화를 볼땐 먼저 토렌트나 웹하드를 찾아. 그래도 없으면 IPTV를 통해 비디오를 보지. 우리는 편리하게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게 되었어. 더이상 몸을 움직여 비디오방으로 가지 않아도 돼.


 우리가 얻은게 또 하나 더 있어. 자본주의란 오디션의 슈퍼스타, ‘플루토크라트‘ 를 얻었어! 이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줄 알아? 전세계 부의 반을 가지고 있는 세계 상위 1%의 사람들이야! 이건 정말 너무나도 어마어마한 부라서 감히 체감 할 수도 없어! 아, 그들 부모가 부자여서 그들도 부자인게 아니냐고? 너 빨갱이니? 아니야! 그들 대부분은(모두는 아니지만) 자수성가 했다구! 망한 옆집 비디오 대여점 주인과는 다르게 그들은 오늘날 기술혁명이 어떻게 삶을 바꿀 것인가를 읽어 냈어. ‘세계화’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그들은 읽어 냈다구! 자본주의를 그저 욕만하는 멍청이들과 다르게 그들은 자본주의란 룰을 읽어 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통찰력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에너지를 함께 가지고 있었어. 정말 멋지지 않니? 


 하지만 슬픈 사실도 있어. 우린 이웃 비디오 주인 아저씨를 잃었어. 그뿐만 아니야. 우린 비디오 대여점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도 잃었어. 몹시나 슬픈일이야. 한때 내 꿈이 비디오방 주인이었거든. 그리고 이상해. 분명 몇 십년 전보다 내 삶은 윤택해진 것 같은데, 편리해 진 것 같은데, 분명 내 아버지가 예전에 벌었던 월급보다 많은 돈을 지금 벌고 있는데,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 이렇게도 선명해. 이게 얼마나 선명한지 종족번식의 욕구를 이길 수 있는 선명함이야. 언제 나락으로 떨어질 지 모른다는 불안감. 미친 불확실성의 시대. 그곳에 내가, 우리가 살고 있는것 같아. 


내가 너무 비관적이지? 맞아.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것은 떨어질 수도 있지만 올라갈 수 있는 유동성이 확보된 사회라는 건데. 맞아 난 너무 나쁜쪽으로만 생각하는것 같아. 이지성이란 사람도 말하잖아? 책만 많이, 그리고 제대로 읽어도 성공할 수 있다고.(물론 헛소리지만) 근데, 내가 성공해서 플루토크라트가 되면 뭐해? 플루토크라트 아닌 99%의 사람들은 여전히 불확실성에 있는걸. 그들도 생각해야지.(나 완전 짱 착하지?) 그리고 플루토크라트가 되면 뭐해? 그렇게 되고 난 다음에도 피곤하게 일해야 할텐데. 출장을 밥먹듯이 가고. 혹시나 2등으로 떨어질까 불안해하는건 마찬가지일테고. 나 일하는거 싫어. 열심히 일해서 갑부 되는거 보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안정되게 살면 좋겠어. 그런데 이거 갑부되기 보다 적당히 일하고 안정되게 사는 삶이 더 어려운거 같아. 역시 공무원이 최고라구! 


 아 그런데, 그 플루토크라트란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 있는거야? 실제로 있긴 한걸까? 티비나 신문에선 보이는데 내 주위에는 단 한명도 없어. 정말 있긴 한거야? 혹시 상상속의 동물 아닐까? 혹시 그건 환상이 아닐까? 


너무 시덥잖은 말만 했지? 이것도 나름 서평이니까 플루토크라트 책이야기로 넘어가자. 이 책은 플루토크라트를 설명하고, 플루토크라트를 낳은 인큐베이터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을 말해줘. 세계화, 파편화, 기술 혁명 등등. 그리고 그들이 이런 것들을 어떻게 이용해 현재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는지도 말해줘.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그들의 문화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사례를 들어가면서 자세히 말해줘. 너무 자세히 말해줘서 귀찮을 지경이야! 여튼 사례 중심의 서술이란게 특징이야.(요즘 경제학 책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나오더군, 사실 좀 불만이야.) 그리고 자신의 궁극적 의견이라 할 수 있는 결론에 대한 양이 너무 짧아! 그리고 좀 온순해. 불만스러워. 


저자의 결론은 이런 것 같아.(확실하지 않아) 플루토크라트란 현상은 가치 중립적이야. 그들은 선한 사람일 수도 있고 악한 사람일 수도 있어. 오히려 플루코트라트란 유동성, 역동성을 낳을 수 있는 측면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동작한 하나의 예일 수도 있어. 문제는 선하거나 악한 사람일 플루토크라트가 악해지도록 유도케 하는 현 자본주의 시스템에 있어. 


너무 파편화 되서 모르겠지만 사실 세계는 여러개의 리그로 나누어져 있다고. 하부리그 상부리그 이런 식으로. 유동성이란 것은 하부리그의 팀이 상부리그로 가고, 상부리그의 팀이 하부리그로 가는 것이 빈번하게 이뤄진다는 것이지. 그런데, 이 유동성 덕분에 상부리그에 속하게 된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유동성을 원치 않게 될 가능성이 커. 당연하지. 자신은 올라갈때로 올라갔으니까 변화를 원치 않는거야. 이건 어쩔 수 없는거지. 그 사람들을 탓할 수도 없어. 그들은 결국 시스템을 입맛에 고치려 할거야. 오디션 프로그램의 참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심사위원이 되려는 것이지. 그것은 불공평한 사회로 이어질 것이고 가진자는 더욱 가질 것이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겠지. 


결국 플루토크라트를 낳았던 사회는 플루토크라트들에 의해 더이상 플루토크라트를 생산할 수 없게 될거야. 물론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어. 플루토크라트들이 선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 되지 않겠지. 하지만. 개인의 선함, 악함에 미래가 결정되는 시스템은 결코 좋은 시스템이라 할 수 없다구. 그래서 저자는 규칙을 말하는 거야. 약간 뻔한 결론이지? 


책 이야기는 그만두고다시 한번 돌아와서 말해보자. 그런데 도대체 플루토크라트란게 있긴 한거야? 내가 정말 본적이 없어서 그래. 상상 속의 동물 아닐까? 99%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플루토크라트란 너무 먼 곳에 있는 존재라서 개별 사례를 들어도 도대체 와닿지가 않아. 내가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사소한 불만은 이런거야. 결국 저자는 불공평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꺼낸 플루토크라트란 소재가 과연 적절한가? 라는 질문이야. 플루토크라트 없는 우리들 주위에도 충분히 불공평을 발견할 수 있거든. 아, 써놓고 보니까 그렇구나. 불공평만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면 플루토크라트를 말할 필요가 없어! 불공평은 차고 넘친다구! 결국 저자는 플루토크라트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거구나. 저자는 플루토크라트 ‘빠’ 였어! 그럼 저자는 플루토크라트란 영웅을 더이상 볼 수 없는 사회가 무서워서 이런 글을 쓴것일까? 아마도 그런것 같다. 그녀는 진성 플루토크라트 빠순이였어! 쳇! 


그게 싫어! 난 플루토크라트와 상관 없어! 플루토크라트 퉤퉤퉤! 난 플루토크라트가 되고 싶지 않기에 더 이상 플루토크라트를 낳을 수 없는 시스템이 된다해도 괜찮아! 굳이 그것을 떠올리지 않고서라도 이 세계는 불공평이 너무 넘쳐난다고! 그것들을 먼저 해소해줘! 플루토크라트 따위 더이상 생겨나지 않아도 좋아! 내가 원하는 것은 슈퍼스타가 아니라 내 신청곡을 노래해줄 수 있는 길거리 가수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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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왕국이 퇴색해 가는 것은 후진 공화국이 붕괴되는 것보다 훨씬 더 서글프다

개미와 타나토노트는 고전으로 불릴 수 있는 명작이다. 그는 참신했고 치밀했다. 베르나르식 소설이 가지고 있는 참신함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난 더 이상 그의 글에서 예전의 치밀함과 성실함을 찾을 수 없다. 제3인류는 베르나르란 왕국이 퇴색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충 떠올려봐도 비판할 거리가 참 많다.

  1. 무리한 설정, 그것을 애써 설명하려 하지만 실패함.
  2. 무리한 설정에 의해 탄생된 '멍청하고 전혀 매력이 없는' 주인공들
  3.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의 행동들
  4. 헐리우드적 클리쉐들(뜬금없는 추격신, 스트립 댄스, 적절한 타이밍의 사건들, 서양인이 세계를 구한다!)
  5. 개연성 없음, 반복되는 우연들(소설가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우연을 다루는 솜씨이다.)
  6. 뜬금없는 한국 찬양.
  7. 등등등...

위 모든 것을 포괄하는 글을 쓰는 것은 내 필력으론 무리이다. 때문에 1과 2에 집중해 제3인류에 대해 비판해본다.


베르나르가 진화를 들고 왔다. '아버지들의 아버지'에서 빠진 고리를 찾았던 그는 제3인류에선 인간 이후의 인류와 인간 이전의 인류를 창조했다. 생물의 크기가 그것의 생존력에 영향을 줄 것이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그는 거인, 인간, 초소형 인간으로 이어지는 '인류 라인업'을 제시한다. 이것이 제3인류의 기본 설정이다. 설정을 비판할 수는 없다. 내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그가 이 설정에 ‘그럴듯함’을 부여하기 위해 여느 때처럼 과학이란 방법론을 가져왔고, 그것이 실패했다는 것에 있다.


설정은 설정일 뿐이다. 설정은 소설가가 마련한 장치며, 소설 속 작은 세계다. 때문에 작가는 기독교의 신처럼 "설정이 있으라"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이것에 과학이란 이름을 붙이고 설정에 대해 근거를 제시하려고 한다면, 대충하면 안된다. 철저해야 한다. 그것이 베르나르급 작가라면, 초판으로 20쇄를 찍는 작가라면, 더욱 철저해야 한다.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인간 이전의 인류, '거인' 설정을 보자. 주인공의 아버지는 남극을 탐험하다 거인 화석과 거인이 그린 벽화를 발견한다. 화석과 벽화를 본 아버지는 이전에 거인이 지구를 지배했다고 믿게 된다. 베르나르는 독자가 주인공 아버지의 입장에서 거인 화석과 벽화를 보게 함으로써 독자가 이 설정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전 지구를 지배했다는 거인들의 화석이 왜 오직 이 남극에만 존재하는거지?"


질문이 생겼던 것이다. 거인의 화석이 왜 남극에서만 발견될까? 라는 질문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질문이고, 예측 가능한 쉬운 질문이다. 그러나 그곳의 그 누구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고고학자인 그들은 과학적 근거로 벽화의 내용에 설득력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신화들과 미스터리들을 꺼낸다. 그 누구도 질문하지 않는다.


왜 그들은 질문 하지 않을까? 우린 답을 알고 있다. 베르나르가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베르나르의 대답이 신화와 미스테리말곤 없기 때문이다. 베르나르가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설정을 했기에, 주요 인물의 질문하는 입을 막은 것이다. 그것 때문에 주요 인물들이 멍청해져버렸다. 독자는 그들에게서 학자의 매서운 눈빛을 느낄 수 없다. (그 학자는 벽화 근처에서 다이너마이트도 주저 없이 터트린다.)


주인공 다비드를 잠시 살펴보자. 1권 162페이지를 보면 피그미족이 인류의 미래라고 주장하는 다비드와 그것에 반대하는 콩고 가이드의 대화를 볼 수 있다. 잠깐 보자.


- 내가 보기에 피그미들은 미래의 인류를 대표하고 있어요

- 피그미들이 미래의 인류를 대표한다고요? (중략) 당신은 모든 것을 뒤집어서 생각하고 있어요, 세상을 거꾸로 이해하고 있단 말입니다. (중략) 스마트폰이 없어요! 성도 없고 그저 이름만 있죠. (중략) 그들은 말귀를 도통 못 알아듣죠. (중략) 그들은 거울을 보면 환장을 해요. 거울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는 자들이죠. (중략) 그들은 거울 단계를 넘지 못한 아이들일 뿐이라고요!

- 그렇다면 미래는 아이들의 것일지도 모르죠

- 피그미 사회는 여자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요. 수효도 여자가 더 많아요. (중략) 유아들은 사망률이 높아요. 피그미들의 수명은 아주 짧아서 40세를 넘기는 경우가 드물죠. 정말이지 진화했다고 말할 수가 없는 인간들이라고요. 하물며 미래의 인류라니, 그건 말도 안 돼요! (중략) 커지는 것이 미래에요. 모든 전문가들이 그 점에 동의하고 있어요

- 자연은 때때로 전문가들의 허를 찌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 모두의 견해가 일치하는 경우에도 말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틀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다수라고 해서 그들이 옳은 것은 아니다> 라고 했죠.

- 아무튼 이러고저러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미래의 인간은 당연히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아름답고 더 건강할 겁니다. 그건 분명해요!

- 피그미들이 이곳의 풍토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들이 에이즈에도 저항력이 있을 것으로 믿고 있어요. 그러지 않은가요?

- 이미 대답했는데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군요. 그들은 병원에 가지 않고 죽기 때문에 무슨 병을 앓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요.


이것은 기묘한 대화이다. 피그미들을 욕하는 가이들의 말도 신뢰가지 않지만, 다비드의 말버릇은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가이드는 그나마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며 자신의 의견을 다비드에게 피력하고 있다. 그런데 다비드는 어떤가? 그는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단순히 이렇게 말한다. "미래는 아이들의 것일지도 모르죠", "틀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다수라고 해서 그들이 옳은 것은 아니죠". 다비드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타인을 설득시키려면 저런 '잠언'을 내뱉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의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상대방의 말은 귓등으로 들어야 한다. 저렇게 '정신승리'를 외치는 주인공에게서 난 어떤 매력도 느낄 수 없다.


1권 353페이지를 보면 오로르를 초소형인간(제3인류) 창조 프로젝트에 끌어들이기 위해 다비드가 오로르를 설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매우 참혹한 대화다.

- 오비츠 대령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은 어떤 반동 세력에게도 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 내자는 거에요. 

- 더 작은 인류, 그리고 더 여성적인 인류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죠? 

- 오비츠 대령은 그들이 훌륭한 전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키가 아주 작고 저항력이 강해서 정상적인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침투해서 작전을 벌일 수 있는 특수 요원들 말이에요.(중략) 

그들이 미니 첩보원들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다 한들, 그래서 얻을 게 뭐가 있죠? - 그 프로젝트는 이란과 연결되어 있어요. 자파르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거에요. 우리가 첩보원들을 보내 그들의 군사 시설을 파괴할 수 있다면 늙은 수염쟁이들의 독재에 맞서 투쟁하는 민주적인 대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거에요. 

- 난 이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어요. (중략) 문제가 되는 것은 핵무기나 이란이 아니라 인구 과잉이라구요. 

- 당신이 그렇게 냉소적으로 나오다니, 뜻밖이군요. 

- 이건 냉소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에요. (중략) 아무튼 그들이 죽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에요. 

- 지금은 그렇게 말해도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당신이 이성의 편에 서도록 만들 거예요.


이토록 생각없는 인물간의 대화를 보는 것 만으로 가슴이 아픈데, 그 인물들이 선한 역할을 담당하는 주인공이라는 것이 더욱 슬프다. 게다가 다비드는 대화 말미에 "당신이 이성의 편에 서도록 만들거에요"라며 또다시 정신승리를 시전하고 있다. 신념은 굳건한데,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지능을 가진 머리가 다비드에겐 없다. 오직 믿음과 신념으로만 똘똘 뭉쳐진 주인공인 것이다.


그런데 이 대화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베르나르는 자신이 만든 주인공 다비드가 하늘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자, 다비드가 가진 신념이란 굉장히 무서운 신념이다. 그가 오로르에게 제안하는 것은 유전공학을 이용해 초소형 인간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초소형 인간을 첩보원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끔찍한 생각이다. 인류를 걱정하는 주인공이라면 이것이 생명윤리에 어긋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제3인류가 이후에 어떤 상황을 만들것인지 조금이라도 생각해야 한다.(전생에 그가 만든 인간이 거인을 멸종시켰는데, 어떻게 그와 비슷한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다비드는 이런 생각을 깊게 하지 않는다.


더욱 무서운 것은 다비드가 그녀를 설득하는 방식이다. 다비드는 이란이란 거대 악을 막아야 한다며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달라고 그녀를 설득한다. 이거, 위험하다. 거대 악을 설정하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남을 설득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찾을 수 없을 때나 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우리가 욕하는 정치인들이나 사용하는 방식이다. 베르나르는 이런 인물을 선한 주인공의 자리에 놓는 것은 피했어야 했다.(악역으론 어울린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초소형 인간을 만들고, 그들을 첩보원으로 만들고, 그들을 이란 사태의 현장에 투입하려면 대략 20년은 걸릴 것이다. 이것은 너무 늦다. 너무도 늦다. 윤리적 문제를 떠나서 실용적으로 살펴도 고개를 젓게 하는 방안이다. (물론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들은 초소형 인간을 만드는데 성공하고, 다행히 그들의 발달 속도가 인간보다 10배정도 빨라 몇년 안에 초소형 인간을 이란에 투입하지만, 다비드가 오로르를 설득하는 시점에서 다비드와 오로르는 초소형 인간의 발달 속도가 인간보다 10배 빠른지 알 수 없었다 -오! 만들고 보니 발달 속도가 10배 빠르네? 만세! - )


그렇다면 우리들의 똑똑한 주인공들이라면 질문해야 한다. 하지만 오로르는, 다비드는 질문하지 않는다. 질문을 할 수도 없다. 왜냐? 베르나르가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는 자신이 수습할 수 없는 설정을 가져왔고, 그냥 가져만 놓는 것이 아니라 무리하게 그것을 이야기 속에 녹이려 했다.


질문하지 않는 인물들, 생각하지 않는 인물들, 자신만의 신념만이 가득한 인물에게서 난 전혀 매력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의 비정상적 결정을 옹호할 수단을

"이것은 운명이에요, 징후에요!"

라는 말로만 베르나르가 대신한다면, 맙소사, 왕국이 무너지고 있다.


베르나르는 인류를 걱정하기 전에 갈수록 지능이 퇴화되는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해 더 많이 걱정해야 한다. 베르나르는 그들에게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고, 질문하는 능력을 고양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선 일단 본인의 지능을 진화시켜야 한다. 이제 인류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시라. 지구의 멸망보다 당신의 소설이 더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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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감을 가지고 구입한 "근대문학의 종언 - 가라타니 고진" 이었는데, 이것이 내게 큰 실망감을 안겨줄지는 미처 몰랐다. 실망감의 원인이 그의 주장이나 논지가 나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글을 지독히 못쓰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더 날 놀라게 한다. 고작 10페이지 읽으면서도 시험에 시달려야 했다. "고진이란 사람은 유명한데, 이 사람이 글을 못쓸리가 없어. 내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일꺼야" 하지만 난 시험에 들었다. 이 사람은 글을 못쓰는 사람이다! 


아래에 "고진이 글을 못쓰는 사람이다" 라는 명제의 근거를 몇가지 제시한다. 누군가 이것에 대해 "고진이 글을 못쓰는게 아니라 이해력이 모자란 것"이라고 근거를 들어 말해줬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다. (아래의 인용은 모두 근대문학의 종언 중에서 "3장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온것이다. )


프랑스에서는 사르트르의 존재가 너무 큰 나머지 다음 사람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때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무리하게 사르트르를 비판하거나 조소하거나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들뢰즈가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실은 모두 동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사르트르는 그에 대한 비판으로서 이루어진 것을 전부 선취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데리다는 '현전성의 철학'을 비판했지만, 사르트르가 '상상력'에 대해 쓴 것이 그것입니다. 또 앙티로망 역시 원래 사르트르가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구토'는 최초의 앙티로망이었습니다. p45, 강조는 인용자

- 강조된 문장을 보자. "사르트르가 그에 대한 비판으로서 이루어진 것을 전부 선취하고 있었다"라고 했을 때, 도대체 비판으로서 이루어진 것이 뭐란 말인가? 저 문장 뒤에 나온 고진의 예시를 보면 데리다가 '현전성의 철학'을 비판했는데, 사르트르가 상상력에 대해 썼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르트르가 상상력에 대해 쓴 것이 데리다의 현전성의 철학 비판으로 이루어진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선취(이미 얻다)'란 단어가 도대체 왜 붙는 것인가? 강조된 문장은 고진은 자기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너무 성의 없게 함축해 문장을 쓴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는 글을 못쓴다는 것을 보여준다.


... 그러나 내가 근대문학의 종언을 정말 실감한 것은 한국에서 문학이 급격히 영향력을 잃어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1990년대에 나는 한일작가회의에 참가하거나 한국의 문학자와 사귈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이렇게 될지라도 한국만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p48, 강조는 인용자

- 맙소사, 고진은 한국에서 문학이 급격히 영향력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단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느낌의 근거가 한일작가회의에 참가하거나 한국의 문학자와 사귈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란다. 아니, 장난하나? 한국의 문학자와 사귀면서 이러 이러한 정보를 얻었기에 어떠한 느낌을 받았다고 써야한다. "사귈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라는 것 자체가 저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다니.


...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턴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동감을 표했습니다.

- 위 문장은 굉장히 부자연스럽게 읽힌다. 쉼표(,) 의 쓰임이 굉장히 이상하다. 고진은 마치 '그'가 말하는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은 듯 하다 그런데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부분은 그대로 옮겨 적은것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런데 "언제 부턴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는 그의 말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으로 읽힌다. 이것은 문장의 일관성을 해치는 것이다. 고진은 글을 못쓴다.


문학의 지위가 높아 지는 것과 문학이 도덕적 과제를 짊어지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과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다면, 문학은 그저 오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좋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입니다. 자,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나는 애당초 문학에서 무리하게 윤리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말해 문학보다 더 큰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동시에 근대문학을 만든 소설이라는 형식은 역사적인 것이어서, 이미 그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p53, 강조는 인용자

- 장난하나? 앞 문장은 문학이 단순히 오락화 되는 것을 비판해 놓고서, "나는 애당초 문학에서 무리하게 윤리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니. 뭐하자는 건가? 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실히 말하지 않나? 난 이부분에서 책 읽기를 접었다. 빨간줄 그은 곳이 많아(좋은 표현에 그은 것이 아니다. 엉터리 문장에 그엇다.) 팔수가 없다는 사실이 날 슬프게 한다.


누군가 말해줬으면 한다. 내가 잘못 읽은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독해하는 것이 올바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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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용


에덴의 용은 뇌 과학에 대한 이야기이다. 더불어 진화 심리학에 대해서도 약간 맛볼 수 있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동물도 언어로 인간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책에는 침팬지의 예가 나온다. 연구자가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쳐줬더니 침팬지가 그 수화를 제법 잘 사용하고, 가르쳐준 단어를 응용해 새로운 문장을 창조해내기도 하더라는 결과는 내게 제법 충격적이었다. 거기에 더해 자신에게 수화를 가르쳐준 인간이 멀리 떠나게 되자 침팬지가 그를 보며 한 수화의 내용 - 침팬지는 수화로 Don't Cry me라고 말했다고 한다 - 은 가슴을 찡하게 했다. 

인간의 뇌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해준 좋은 책이었다. 


의식(하룻밤의 여행시리즈)

하룻밤의 여행 시리즈의 특징은 짧은 쪽 수 안에 주제와 관련된 여러가지 논의가 서로 대화하듯이 쓰여있다는 점에 있다. '의식'또한 마찬가지 인데 이 책 안에서는 인간의 의식을 대하는 두가지 방식에 대해 최대한 중립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인간의 의식을 생각해볼때 두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이원론 이며 또다른 하나는 일원론이다. 

이원론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입장이며 일원론은 인간은 오직 영혼, 또는 관념 이거나 오로지 '물질'이라는 입장이다.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믿음이다. 사람이 죽어서 그 영혼이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가거나 다시 환생한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이원론자이다. 그런데 이 이원론은 중요한 문제가 남는데 비물질인 영혼과 물리적인 법칙에 지배받는 물질이 어떻게 상호 교류하는가 이다. 이것은 정말 해결할 수 힘든 난제로 보인다. 


일원론 중에 관념론은 사람이 구성하고 있는 세계란 일종의 '상상' 또는 '환상'일 뿐이라는 의견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처음부터 물질이란 없는 것이다. 다만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어떤 문제가 남는가면, 이 세상의 구성원은 정말 다양하고 수 없이 많은데 어떻게 이들의 '상상' 또는 '환상'이 이렇게 완벽하게 교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일원론 중 유물론은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오로지 '물질' 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모두 물리적인 반응에 불과하다. 이 유물론을 극단적으로 몰고가면 내가 글을 쓰는 것도,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것도 모조리 다 물리적인 인과관계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가장 그럴듯 하나 역시 난제가 있다. 뇌를 살펴보면 우리가 하는 행동이 어떻게 신호가 가고 그것이 어떤 신경 체제를 통해 전달되어 행동으로 나타나는지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 그리고 '감상'이 어떻게 저장되고 인간의 행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지는 알 수 없다. 특히나 기억이 뇌의 어느 부분에 저장되는지 밝혀진 바가 없다. 이것이 만약 밝혀 진다면 놀라운 들이 벌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가능하다면 기억을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떤 기억을 사진이나 텍스트로 뽑아 낼 수도, 혹은 가짜 기억을 인간에게 삽입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말 무서운 세상이 올 것이다. 부디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 


AI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의식 책을 꼼꼼이 읽어 보길 권한다. 많은 사색을 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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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토마스 만


믿음사편 토마스 만 단편집을 읽은 후 내용이 제법 좋아 열린책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다시 보았다. 여러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재미도 있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었다.


토마스만은 단편 대부분은 사람들을 '예술가' 와 '일반자'로 구분한 뒤 '예술가'의 비애를 소개하는 것으로 줄거리가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비애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식하는 자, 관찰하는 자로서만 존재하고 참여하는 자, 행동하는 자로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의 비애를 말한다.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예술가 지만 일반 사람 '시민'이라 표현되는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고 동경한다. 물론 예술가로서 자신에 우월감을 느끼며 남들을 아래로 내려 보지만 그것은 어느새 슬픔으로로 변하게 된다. 


나와 같이 허영심으로 문학과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은 이들의 마음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천재들, 예술가들, 또는 재능은 없으나 예술가로 태어난 사람들의 마음을 난 글로 추측할 뿐 감히 알 수 없다. 


...

그리고 알고 싶지만, 실제로 느끼고 싶지는 않다. 지금도 때때로 고독하고 외로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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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첫째주 독서노트

즐거운 책 이야기 2012.06.08 09:16 Posted by 아일레프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  


흥미롭게 읽고 있음. 책 초반에 움메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독특하게 해석하는 저자의 시각에 놀랐음.  

더 읽어 봐야겠지만 1/3쯤 읽은 시점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짐. 

"온전히 텍스트만을 바라보는 독서란 가능한 것인가?" 

바야르는 저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보고 '사람은 자신의 삶(또는 자신)과 텍스트를 완전히 분리해서 볼 수 없다라는 전제'를 확장 하고 확장해 나름 대로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음. 그런데 그 의견이 굉장히 흥미로움.  

"책읽기"에 대한 책을 좋아하는 분이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함. 



죽음과 소녀, 아리엘 도프르만 

'경계선 너머' 까지 읽었는데 개인 적으로 '경계선 너머'만 맘에 들고 '과부들'과 '죽음과 소녀'는 그저 그랬음.  

과부들이 재미 없었던 이유는 그 당시 내 심리적 상태가 이런 이야기를 읽기 힘든 상황이라 줄거리의 흐름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유추하고 있음. 연극을 기대함.  

죽음과 소녀는 음. 재미있었으나 주제 자체가 흔하고, 결론도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내게 큰 임팩트를 주지 못했음. 

경계선 너머는 재미있었음. 우리나라의 사정에도 잘 맞아 이해도 잘 가고, 중간 중간 나오는 유머에 킥킥 대며 웃을 수 있었음. 실제 연극을 보는 것 처럼 쉽게 상상할 수 있게 만들어 줘서 참 좋았음.  

이제 연옥을 기대함.  



기적의 시대, 보리슬라프 페키치  

이전에 사놓은 책. 처음 읽었을 때는 내 안의 기독교 단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조금 읽고 그냥 덮었었는데 어제 몇 편을 읽음.  

이건 정말 패러디의 극강임. 삐딱하게 생각하기의 극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중간 중간 웃음이 나오다가도 각 이야기의 마지막을 읽을 때면 정말 오싹 오싹 함.(게다가 그 반전을 일으킨 장본인이 사실 기적을 행한 예수이니.. 거참. ) 

음.. 오싹한 기분을 느끼고 싶은 기독교 인은 한번 읽어 보기 바람. (살 필요까지는 없고 서점에서 이야기 하나 정도만 읽으면 괜찮을 듯 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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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는 체리 신드롬 이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19 인데요, 대부분 그럴 듯해 보이는 책들과 뭔가 철학이 있을 같은 책들 가운데 끼어있는 책은, 굉장히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만화가 '금기'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받아들여 없는 금기를 하나도 아닌 두 가지를 짬뽕해서 굉장히 묘하고도 아름답게 풀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이야기가 더럽다거나, 몹쓸 일이라거나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예전 아다치 미쓰루의 만화, 제목이 기억이 안 나는데 그것도 이와 비슷하게 '금기' 소재로 삼고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와 딸의 사랑을 다루었는데요, 물론 친딸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만화는 감흥을 주지 못했습니다. 서사가 조금 억지스러운 구석이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우린 "롤리타"라는 유명한 소설도 알고 있는데요, 소설도 제겐 별로였어요. 주인공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더군요. 자식은 변태에요. 도저히 그와 하나가 되어 이야기를 읽어 나갈 없었었습니다. 그런데 체리 신드롬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말도 안될 법한 설정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흘러갑니다.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즐겁습니다. 캐릭터는 어떻습니까? 평범한 남성을 대표하는 듯 보이지만 강단 있고 멋진 남자 주인공, 너무나도 섹시하고 매력적인 그의 여자친구, 어려지는 병에 걸려 초등학생의 외모를 가진 귀엽고 귀여운 하나의 여자친구. 모두들 사랑스럽고 생기가 넘칩니다.

 

일부일처제의 사회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없는 남자 한 명과 여자 명의 트라이앵글 같은 사랑, 그리고 3 간의 섹스, 그리고 롤리타. 이것은 금기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면 안돼요.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이야기와 함께 있을 때 있을법한 일로 변해버립니다. 우리가 흔히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라는 말을 하죠?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겁니다. 우리는 남의 불륜을 보면 단어 자체가 가지는 부정적인 이미지만을 떠올리고 사람들을 도덕적인 잣대로 평가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불륜은 단어 자체로 읽히지 않거든요. 그것은 단어 아니라 자신이 놓여진 여러 가지 상황과 맥락, '이야기'속에서 읽혀집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로맨스 것이지요. 그것은 자신에게 도덕을 뛰어넘는 사랑의 경험이 있게 됩니다.  그것이 이야기, 서사가 가지는 힘입니다. 맥락과 상황 안에서 금기는 있을 법한 일이 잠시 머릿속에서 현실이 됩니다. 그리고 즐겁게 하지요. ,우를 갈라야 하고 ,백을 논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잠시 벗어나 도덕과 금기를 벗어나 무지개 회색지대로 가봅시다. 채리 신드롬은 좋은 만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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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보살예수

즐거운 책 이야기 2011.03.01 16:53 Posted by 아일레프

보살예수 - 10점
길희성 지음/현암사

성서는 성서 그 자체만으로 읽혀서는 안된다. 기독교는 그 외부와 만남을 통해, 그리스 철학, 실존주의, 맑시즘 등 과의 만남을 통해 그 보편성을 넓혀왔다. 그러한 만남이 없이 성서만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그것은 너무 조잡하다. 성서와 계시 만으로 기독교는 결코 세계 종교가 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ㅡ 길희성, 2011.02.20 새길교회 청년들과의 대화 중에서

외부와의 만남을 통해 기독교의 보편성을 넓힐 수 있다고 믿는 그가 보살예수라는 책을 썻다면 그 목적은 제법 분명해 보인다. 기독교가 불교라는 외부와의 만남을 통해서, 부처, 또는 보살과의 만남을 통해서 기독교의 보편의 영역을 더욱 확보하는 일에 있을 것이다. 아니, 사실 이 말은 길희성 교수님의 생각을 심히 왜곡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보편성을 넓히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와 불교가 가지는 근본적 메시지의 보편성을 넓히는 것이다. 나아가 종교 다원주의자로서의 그는 기독교와 불교가 서로 각자 올라가는 산의 정상이 동일함을 자신과 우리에게 보이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와 기독교는 굉장히 다르다. 태어난 역사적 배경이 다르며 중심 사상도 달라도 너무 다르다. 불교는 만물의 근본의 원인인 일자(一字)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무신론 종교라 부를 수 있다면, 기독교는 유일신 종교의 대표주자이다. 기독교가 개인의 영혼의 존재를 굳게 믿고 있다면, 곧 실체론을 주장한다면 불교는 철저히 비실체론이며 유명론을 말한다. 기독는 하나님 나라와 유일신의 존재를 말함으로써 저기 피안(彼岸)의 세계를 항시 바라보지만 불교는 피안과 형이상학에는 도무지 관심이없다. 이렇게 명백히 드러나는 차이를 극복할만한 같음이 두 종교에, 예수와 부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일까? 보살예수, 이 책의 부제는 기독교와 불교의 창조적 만남이지만 자칫하면 어색한 만남으로 끝날 수 있는 많은 난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길희성교수의 이 책은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불교에 대해 자세하고도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이 불교란 기독교와 같이 하늘에서 벼락으로 떨어진 계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 부처와 그의 제자들이 치열한 현실과의 싸움을 통해서 얻은 것이기에 기독교보다 더욱 더 명료하고 논리적이다. 그리고 그 싸움이란 철학이 세상과 싸우는 방식과 다르지 않아보인다. 곧 현실의 분명한 문제의식, 그리고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개념과 이론의 생성의 반복에 다름 아닌 것이다.

불교와 불교의 창시자 싯타르타의 목표는 매우 간단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생기는 고통을 없애는것이 바로 그의 목표이고 불교의 목표이다. 싯타르타는 이 고통의 원인이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이 "있지도 않은 것"이란 무엇인가? 바로 세상의 모든 것에 비 의존적인 "자아"의 존재이다. 당시 인도의 사상은 철저한 실체론이라 불릴 수 있었다. "카파 우파니샤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아는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니다. 어디에서 오거나 무엇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태어나지도 않고 영원하며, 원초적이다. 육신이 살해될 때도 이것은 살해되지도 않는다.

불교는 당시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이 사상에 정면으로 대항한다. 육신이 살해될 때도 살해되지 않는 영원하며 원초적인 자아의 존재에 대해 부정한다. 또한 이에 대한 앎으로서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벗음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실체론에 대항하기 위해 탄생한 이론이 바로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이다. 연기론이란 '나'란 결코 혼자 존재할 수 밖에 없고 '나'란 다른 것에 의존재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선언한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소멸한다.

불교는 모든 것이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타자"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그럼으로 자신의 존재가 사실 없음을 아는 것, 이 앎을 통해 자신을 변형하고 모든 집착을 끊고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극복하는 것을 열반이라 하고 이 열반에 다다른 자를 아라한(阿羅漢)이라 칭했다. 곧 초기 불교의 목표는 개개인이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열반에 대한 개개인의 목표가 강조되자 문제가 생겼다. 열반이란 목표 내에서 "개인"으로서의 깨달음과 해탈만을 중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열반이라는 목표가 오히려 사람을 더욱 "개인"으로 몰고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초기 불교는 그 다음 불교, 곧 대승 불교에게 "작은 수레"라는 놀림을 받게 되고 안타깝게도 이것이 곧 이름이 되어 후대 사람들에게 소승불교라 불리게 되었다.

이제 대승불교의 문제제기가 시작되었다. 개개인의 집착을 끊으려 정진하고 수행하는 행위가 중생과 승려를 더욱 구분하게 되고 이것은 부처가 처음 가르쳤던 가르침과 맞지 않는 다는 것이 그들의 문제제기이다.

살아 있는 다른 모든 생명체가 고통 받고 있는데 행복이 가능 한 것일까? 온 세상이 고통으로 울부짖는데당신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이제 불교의 목표가 개개인의 해탈과 열반에서 중생 일반에 대한 구제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다시한번 이론과 개념이 정립되어야 한다. 대승불교의 이론을 정립했다 할 수 있는 나가르주나는 불교의 연기론을 끝까지 확장해 모든 일체의 것은 공(空)하다라고 말했다. 바로 공(空) 사상이 등장한 것이다. 이 공하다 라는 선언은 '무엇이 없다'라는 것이 아니다. 공은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도 할 수 없고 비존재한다고 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비유비무(非有非無) 인 것이고 생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인 것이다. 이렇게 나가르주나가 설파한 이유는 일체의 모든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이원론을 피하려한 것이다. 곧 생사와 열반을 구분하는 태도를 벗어나 (생사와 열반이 하나다, 번뇌가 곧 보리이며 보리가 곧 번뇌이다.) 사물을 바로 있는 그대로 바로 보는 것에 목표를 두는 것이었다.

이런 공사상을 바탕으로 모든 집착, 심지어 열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것으로부터 불교의 목표가 아라한에서 '보살'로 이동하게 되었다. "보살"이란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보살이란 개념이 무엇이냐면(실로 놀랍기 그지 없는데) 보살이란 모든 생명체가 열반에 이를 때 까지 자신의 열반을 뒤로 미루는 사람을 의미한다. 보통의 중생이 업과 집착에 의해 환생한다면 보살은 자신의 '원'에 의해 스스로 윤회의 수레바퀴로 뛰어드는 것이다.(놀랍지 아니한가? 상상력이 이 정도는 되어야!) 또한 집착과 업에 의해 사람이 환생한다면 보살은 중생에 대한 사랑으로 중생에 대한 집착이 남아 윤회하는 자라고도 볼 수 있겠다. 달라이라마는 이 보살의 하나의 예인 것이다. 이 보살이 되려면 자비심과 지혜가 동시에 필요하다. 지혜만 있으면 자신의 해탈만을 추구하려 하며, 자비만 있으면 번뇌와 집착을 낳아 고통에 빠질 뿐이다.

저자 길희성교수는 이러한 보살의 특징으로 자유로움을 언급했다. 보살은 생사의 세계로부터 자유로우며 보살은 생사의 세계로 부터 자유로울 뿐 아니라 열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도 자유롭다. 또한 보살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자유롭다. 길희성 교수는 예수도 이 보살의 특징에 견주는데 과연 예수 또한 보살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고 보살의 행동방식으로 예수 또한 살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충분히 우리가 인정할 만한 사실이다. 보살과 예수 모두 자비를 말했다. 사랑을 말했다. 생사와 열반을 구분하지 않고 만인의 고통을 극복하려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 놓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는 길희성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충분히 말해지지 않는다. 그는 한발짝 더 걸었다. 보살과 예수의 행동의 같음을 말하는 것을 넘어서서 보살이 보살되게 하는 깨달음과 예수가 예수되게 하는 그것이 동일하다라고 말한 것이다. 보자, 보살이 보살되게 하는 것은 공, 진여(眞如)로써의 공의 깨달음이다. 예수가 예수되게 하는 것은 아빠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이다. 결국 길희성 교수는 이 진여로써의 공의 깨달음과 아빠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이 결국 같음을 말한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 길희성 교수는 기독교인이 인정하는 인격적신으로서의 하나님을 반드시 넘어서야 했다. 이를 위해 그는 공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사유한다.

불교의 공관은 하느님을 대상적 존재로 취급하는 조잡하고 저급한 신관을 가차 없이 파괴하며, 이것은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인들 스스로가 환영해야 할 일입니다. 무한한 하느님, 절대유로서의 하느님은 결코 유나 사물, 혹은 유한한 인격체 같은 존재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뛰어나고 예외적인 존재자라 할 지라도 하느님을 하나의 존재자로 파악하는 한,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무한한 실재를 하나의 유한한 존재로 격하하는 것입니다. 공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유한한 것을 무한한것으로 숭배하는 우상숭배를 방지해줍니다.

그는 기독교인이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격적 하나님으로서의 신관을 초월해야 한다고 말하며 한국 기독교의 보편적인 신관을 비판한다. 만물의 일자로서의 하나님에 인간의 모습을 너무 투영해 기독교의 신관을 유치하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아가 기독교인으로서의 그는 이 인격적 신을 말하는 신관을 넘어서 나아가 공관 이후의 신관에 대해서 논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느님을 만물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면서도 세계와 떨어져 있기보다는 만물에 내재하면서 만물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실재로 생각해야 합니다. 구체적 사물의 유한성을 초월하면서도 다양한 사물에 즉해서 함께 움직이는 역동적 신관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길희성 교수는 공과 사랑의 하느님이 별개의 실재가 아니라 동일한 실재가 달리 이해되는 것이라 말한다. 나가르주나는 이런 말을 했다.

공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성립할 수 있다. 만일 공의 이치가 없다면 어떤 존재도 성립하지 않는다.

길희성 교수는 공의 이치로서의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공이 사랑의 존재론적 의미라면 사랑은 공의 인격적 언어라 말한다. 공이 곧 하느님의 사랑이며 로고스라고 그는 말한다. 또한 그 공의 이치가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사랑의 원리가 이 우주의 궁극적 힘이며 존재론적 원리라 말한다. 예수와 보살은 그러한 우주의 힘, 공의 이치, 사랑, 로고스의 육화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 그는 두 종교의 보편성을 확보하고 두 종교의 근본적 메시지의 보편성을 더욱 넓혀나갔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신관을 숨김 없이 말했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공의 이치가 곧 하느님이라 말하는 부분의 설명이 조금 부족하다고 느꼈으며 그로인해 그의 메시지가 내게는 가슴 벅차게 다가오지 않았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감동할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여러 한계들로 그것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좀더 설득력있게 이해시켜달라고 외치며이 책에 매달리는 것은 나의 욕심일까? 한가지 더 희망이 남는 다면 이것이 이른 리뷰라는 것에 있다. 이 책은 열개의 장으로 이루어저 있는데 내가 읽은 것은 8장 까지이다. 이제 두장이 더 남아있다. 다행이다.

 

References :

  1. 보살예수
  2. 하룻밤의 지식여행 불교편
  3. 공이란 무엇인가
  4. 그리스도인을 위한 오강남의 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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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가본드

즐거운 책 이야기 2011.02.01 22:10 Posted by 아일레프

베가본드란 만화를 보면 '천하제일'에 자신의 길을 정하고 그 길을 거침없이 걸어가는 한사람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주인공 무사시는 천하제일에 가까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평화를 외면하고 전장을 택한다. 그는 늘 이기지만 이겨도 이겨도 개운하지 않다. 뭘까. 왜 그럴까. 게다가 이상하고도 놀라운 것은 싸움에 이긴 그는 흔들리고 싸움에 진 사람은 해방된다는 것이다.

난 이 장면을 보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패배를 얻음으로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무사시는 얻은 승리로 인해 계속 싸워야 하고 그것으로 고통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도대체 왜 싸우는 것인가?

"그걸 몰라서 물어? 강해지기 위해 그렇잖아? 최고가 되기 위해 그래서 그렇잖아?"

그런가? 하지만 '강함'이란 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최고라는 것이 과연 실재하는 것일까? 김민기씨는 그의 아름다운 노래 "봉우리"에서 우리가 정말 올라야 할 봉우리는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한다.

불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술 더 떠서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믿는 허황된 지식과 욕망이 고통을 낳는다."

무사시는 이것을 바보같이 왜 모르는 것일까? 이 만화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무사시에게 이것을 알린다. 네가 쫓는 그것은 사실 없다고. 그 길에서 나오라고. 그 또는 다른 누군가가 그린 허황된 꿈과 헛된 관념을 버리고 진짜 삶을 살라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연을 맺고, 아이를 가지고, 가정을 꾸리라 한다. 무사시는 바보같이 왜 이걸 모르는 걸까?

어쩌면 무사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끝을 볼 수 없다. 저 앎은 무사시에게 성급한 깨달음이다. 무사시는 아직 끝을 보지 못했다. 더 가봐야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고 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자신이 가는 그 길은 실체가 있는 그것이라 믿고 끝까지 밀고 나가야한다. 결국 '헛됨'으로 증명될 그 길의 끝이 무엇인지 감이 오더라도 생각하지 말아야한다. 거기에 이 이야기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그 후에 그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헛됨'을. '~이 공하다'는 깨달음은 그 길 끝에 서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선물이며 축복이다. 지금의 무사시에게도, 그리고 지금의 내게도 이른 깨달음이다. 좀 더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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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즐거운 책 이야기 2011.01.30 01:51 Posted by 아일레프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10점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민음사

이 소설을 읽고 나니 기존의 어떤 소설도 주지 못한 혼돈과 슬픔으로 머리 속이 어질 어질 해졌다. 기존에 머리 속에 차분히 정리되었던 물음표들이 다시 고개를 들어 날 괴롭힌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아이러니와 도덕적 딜레마로 가득찬 불투명한 회색지대라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 중 하나라고 한다면 이 소설은 과연 그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이전에 블로그에 올린 바 있는 소설 "수난"과 한번 비교해보겠다. 작가는 이 '수난'이란 책을 통해 옳음과 그름, 선과 악에 대해 묻고 있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어떤 인물들이 '선'의 편에 있는지, '악'의 편에 있는지 굉장히 자연스러이 쉽게 구분할 수 있고 그것으로 인물들에 대한 호불호가 완전히 갈리게 된다. 수난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스키가 물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작가는 우리가 다른 질문에 대답하길 원한다. "넌 지금 이 현실 속에서 어느 편에 있니?" 라고. 끊임 없이 들려오는 이 질문이 가슴을 꽤나 괴롭힌다. 그렇게 괴롭혀진 가슴은 마지막 장을 덮는 즉시 부글 부글 끓어 오르게 되고, 나만은 이 세상에서 선의 편에 서야 한다고 굳은 결심을 하게끔 만든다. 당장 거리로 나가 짱돌을 들어 이 더러운 세상의 시스템에 집어 던지고 싶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달랐다.

사실 이 소설이 뻔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름다운 아프리카 부족의 풍경을 보여주겠지. 자연과 함께 숨쉬며 공존하는 삶, 무엇인가를 파괴함으로써 얻어지는ㅡ 그것에 인한 반대급부로 얻어지는 뒤끝이 찝찝한 행복이 아닌 '뭔가 진짜 행복'이라 부를 수 있는 그런 삶과 풍경을 보여주겠지. 그러나 그 행복은 서방의 하얀 마귀들에게 짖밟히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확보하게 된 감정으로 그들을 좀 더 미워할 수 있게 되겠지.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작가는 그들의 행복한 모습을 주목해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소설의 분위기는 서방의 하얀 마귀가 오기 한참 전인데도 어둡고 침침했다. 자신이 힘겹게 얻은 강자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 애쓰는 주인공 오콩코의 조급한 모습은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각개약진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으며 그의 성에 차지 않는 그의 아들 은워예의 모습은 마치 나 자신을 보는듯 측은했다. 그들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의 변덕과 예측 할 수 없는 삶의 모습들을 종교와 주술로 풀어나가는 모습들도 내 눈에는 예쁘게 보여지지 않았다. 그들의 삶은 완벽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토피아의 아주 작은 일부라도 발견하고픈 내 욕심과 기대감은 전혀 충족되지 못했다. 쌍둥이가 태어난 것은 대지의 여신에 대한 모독이므로 내다 버려야하는 사회, 다른 부족의 죗값으로 얻었던 이케메푸나, 어느새 오콩코의 아들이 되어주었으며 은워예의 형이 되어주었던 이케메푸나를 죽이라 명하는 숲과 동굴의 신이 지배하는 사회. 그리고 그 이케메푸나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버리는 주인공 오콩코. 내가 이것을 어떻게 예쁘게 봐줄 수 있단 말인가? 당혹스러웠다. 이건 내가 기대했던 풍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처럼 그 곳에도 역시나 전통란 단어의 긍정적 이미지로 덮어버릴 수 없는 사회적 모순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 미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당연스럽게 변화와 '진보'라는 단어를 갈망하듯이 그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곳은 에덴이 아니었다. 인간이 자리를 차지한 땅에 에덴이 자리잡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리고 침략자들은 이런 균열을 반가워 하며 그들에게 살짝 문을 열어 더 나은 세계를 맛보여준다.

백인 선교사가 그들의 종교를 들고 왔을때 몇몇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를 반기며 그 종교를 맞이 했다. 고통을 참으며 아이를 낳았지만 쌍둥이 이기에 버릴 수 밖에 없었던 가련한 여인, '오수'라 불리는 하층민들이 백인의 종교에 흡수되었고, ... 주인공 오콩코의 아들도 부족의 신을 버렸다. 그리고 부족의 지도자 중 한 사람도 그 길을 택하고 말았다. 부족은 처음에 그 종교와 공존을 선택했지만 결국은 깨지고야 말 부대낌이었다. 그들은 몰랐다. 백인이 믿는 신에서 탄생된 종교들은 무한한 사랑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한편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메시지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것을. 들어올 때는 사랑의 얼굴을 보여주지만 어느새 자리를 잡으면 반대편 얼굴을 보인다. 그리고 그 때는 늦었다. 백인의 종교를 뒤에서 조종하는 것이 그들의 신이 아닌 열강이란 것을 알아차린 그 때는 이미 늦었다.

아무일이 없었다는 듯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드넓은 하늘을 날아본 독수리는 노동 없이 먹이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새장 안에서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들도 마찬가지다. 선교사들이 보여준 밝음을 본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한번 생긴 균열은 그 범위를 계속 넓혀가고 인간의 힘으로는 그것을 메우기 어렵다.

카잔차스키의 "수난"에서 난 이 질문을 끄집어 냈다. "질서의 수호인가 사랑과 정의인가" 그때는 대답하기 쉬웠다. "수난"에서 혼돈의 여지는 없다. "질서의 수호"란 편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악하고 비열하다. 카잔차스키는 질서의 편에 서있는 자들의 상황을 배려심 있게 쓰지 않았다. 이 책은 어떤가? "전통이냐 진보냐"라는 질문을 끄집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전통 대신 보수란 말이 더 적당할 것도 같지만 한국에서 저 '보수'란 단어에 원치않게 추가된 부정적 어감을 생각해 볼때 적당하지 못해 전통을 선택했다.) 둘다 빛이 있고 어둠이 있다. "전통"이라고 말하기에는 그들의 무지로 인해 희생당하는 쌍둥이 들이 마음에 걸리며 "진보"라 말하기엔 그들에게 진보의 메시지를 가르쳐주는 교회 뒤의 하얀 마귀들이 걸린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다. 다만 이 아프리카의 땅에 존재하는 개인으로서 슬퍼하고 운명의 신을 저주하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밖에. 부족의 전통안에서 강자로 우뚝 서고 싶었던 오콩코는 그의 꿈을 펼칠 무대 자체가 사라지자 자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죽음과 그들을 함께 묶어 두었던 매듭에 백인이 쑤신 칼집이 들어가자 그들의 모든것이 부서지는 광경을 보며 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질문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전통이냐 진보냐" 이런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것은 사치이다. 다만 애도할 수 밖에. 그들을 이렇게 패배하게 만들었던 이 가혹한 운명의 땅과 시간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눈을 감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 글을 쓴 치누아 아체베는 기독교인이라 한다. 그가 기독교인의 교리를 받아들였다면 그는 나이지리아 기존의 신앙을 버린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는 이 소설을 쓰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신의 땅에 지워진 이 가혹한 역사의 한 부분을 이렇게 가감없이 보여준 그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이 소설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 눈물을 재료로 쓰여진 책인 것이다.

그 눈물의 결실에 깊이 감사한다. 당신 덕에 난 가슴 저미는 이야기를 알게되었다. 고맙다. 하지만 당신의 이 다음 책 "더 이상 평안은 없다"는 읽지 않을 것이다. 가슴 저미는 아픔의 감정은 이것으로 족하다. 더는 알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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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즐거운 책 이야기 2011.01.18 22:59 Posted by 아일레프

어젠 11시에 누웠다. 평소 취침시간보다 약간 이른 시간이었지만 월요일의 묘한 기운이 날 몹시 피곤하게 했기 때문에 어서 잠에 들고 싶었다. 잠을 좀 더 빨리 부르려고 4분의 1쯤 본 "파이 이야기"책을 꺼내 읽었다. 엄청난 실수였다. 주인공이 호랑이와 함께 표류하기 전에 책 넘기는 짓을 멈췄어야했다. 몸은 피곤해 졸려 죽겠는데 이야기의 흡입력이 너무 강해 20분만 더보자, 10분만 더보자 하다가 결국 마지막을 본 뒤에야 잠들 수 있었다. 소설의 참맛은 역시 서사다.

이 소설의 '1'을 여기 둔다. (다시 읽으니 코 끝이 찡하다.)

 

1

아픔을 겪은 후 난 슬프고 우울했다.

공부와, 마음을 다해 꾸준히 행한 종교 의례 덕분에 차츰 삶을 되찾았다. 나는 남들이 이상한 종교의식이라고 여길 만한 예배를 계속 올려왔다. 고등학교에서 일 년을 보낸 후, 토론토 대학에 진학해서 두 가지를 공부했다. 전공은 종교학과 동물학. 종교학 졸업논문 주제는, 사페드 출신으로 16세기의 위대한 카발라 사상가였던 아이삭 루리아의 우주론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동물학 논문은 세발가락나무늘보의 갑상선에 대한 기능적인 분석이었다. 연구 대상으로 나무늘보를 선택한 것은 이 동물의 차분하고 조용하고 내성적인 태도가 갈가리 찢긴 내 자신을 위로해주어서였다.

나무늘보는 발가락이 둘인 종과 셋인 종이 있다. 뒷발은 모두 발가락이 셋이므로, 앞발에 따라 종을 나눈다. 어느 여름, 무더운 브라질 밀림에서 발가락 셋인 나무늘보를 연구하는 행운을 누렸다. 나무늘보는 대단히 흥미로운 생물이다. 유일한 습관이 게으름 피우기다. 하루 평균 스무 시간씩 자거나 휴식한다. 우리 연구팀은 세발가락나무늘보의 수면습관을 실험했다. 초저녁에 잠든 다섯 마리의 머리 위에 물이 담긴 빨간 플라스틱 접시를 올려두었다. 다음날 아침에 가보니, 접시는 그대로 있고 물에는 벌레가 들끓었다. 나무늘보는 해질 무렵에 가장 분주하다. '분주'하다고는 하지만, 좀 그렇다는 것이지 아주 바쁘다는 뜻은 아니다. 이 동물은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서, 시속 400미터로 움직인다. 땅에서는 시속 250미터로 나무에 기어오른다. 이것도 다급할 때의 속도다. 다급한 치타보다 440배 느린 속도다. 급한 일이 없으면 한 시간에 4, 5미터 정도만 움직이는 동물이 바로 나무늘보다.

세발가락나무늘보는 외부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동물학자 비브는 보통의 둔감함을 2점, 극도의 예민함을 10점으로 나누고 나무늘보의 미각, 촉각, 시각, 청각에 2점을 주었고, 후각에는 3점을 주었다. 숲에서 잠든 세발가락나무늘보는 두세 차례 쿡쿡 찌르면 깨어난다. 졸린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지만 찌른 사람은 알아보지 못한다. 모든 걸 흐릿하게 보는 나무늘보가 왜 그렇게 둘러보는지는 불확실하다. 청력의 경우, 안 들린다기보다는 소리에 관심이 없다. 비브는 자거나 음식을 먹는 나무늘보 옆에서 총을 쏘아도 별 반응이 없다고 보고했다. 후각이 약간 낫긴 하지만 과대평가해선 안된다. 나무늘보가 코를 킁킁거려 썩은 가지를 피할 수 있다고 하지만 동물학자 벌록은 나무늘보가 썩은 가지에 매달렸다가 땅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보고한 바 있다.

그런 동물이 어떻게 생존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놈들은 너무 느린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다. 잠과 게으름 덕분에 재규어와 스라소니, 큰수리, 아나콘다에게 먹히지 않는다. 나무늘보의 털에는 건기에 갈색 식물이, 우기에는 초록색 식물이 서식한다. 그래서 나무늘보는 주변의 이끼나 나뭇잎과 뒤섞여, 흰개미나 다람쥐의 둥지나 나무의 일부로 보인다.

세발가락나무늘보는 환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평화로운 초식 동물로 살아간다. 터를러는 "나무늘보의 입에는 언제나 맘씨 좋은 미소가 걸려 있다"고 했다. 내 눈으로 직접 그 미소를 본 적이 있다. 난 동물에게 인간의 특징과 감정을 투사하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브라질 밀림에서 고개를 들다가 쉬고 있는 나무늘보를 볼 때면, 물구나무서서 명상하는 요가 수행자나 기도에 몰두한 은자 앞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 과학적인 접근법으로는 닿을 수 없는 상상력 넘치는 삶을 사는 현자 앞에 있는 느낌이랄까.

가끔 내 전공은 뒤섞여버렸다. 종교학을 전공하는 친구들ㅡ 위가 어디인지 모르고, 엉터리 같은 이성의 노예가 되어 갈피를 못 잡는 불가지론자들 ㅡ 을 보면 세발가락나무늘보가 떠올랐다. 생명의 기적을 보여주는 세발가락나무늘보를 보면 신이 떠올랐다.

과학도들과는 아무 마찰도 없었다. 그들은 다정하고, 무신론자이며, 열심히 공부하며, 술고래들이다. 과학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때는 섹스와 체스, 야구만 머리에 있는 친구들이다.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나는 아주 우수한 학생이었다. 세인트 미카엘 칼리지 시절 사 년 내내 우등생이었다. 동물학과에서 받을 수 있는 상은 모두 받았다. 종교학과에서 상을 못 받은 것은 학과에서 주는 상이 없었기 때문이다.(하긴 종교학 부문에서 어찌 인간이 상을 줄 수 있을까). 토론토 대학 학부생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상은 주지사상이다. 캐나다에서 잘나가는 명사 중에는 그 주지사상 수상자들이 많다. 체격이 다부지고 지나치게 활달한 기질을 가진 그 백인 남학생만 아니었다면, 내가 상을 거머쥐었을 것이다.

그때 받은 모멸감에 지금도 자존심이 상한다. 살면서 고통을 많이 겪으면, 더해가는 아픔은 참기 힘들기도 하지만 사소해지기도 한다. 내 인생은 유럽 그림에 나오는 해골과 비슷하다. 옆에는 늘 씩 웃는 해골이 있어, 야망의 아둔함을 일깨워준다. 나는 그것을 보며 중얼거린다. '사람을 잘못 골랐어. 넌 삶을 믿지 않을지 몰라도 난 죽음을 안 믿거든. 저리 가!' 해골은 낄낄대면서 가까이 다가오지만, 난 놀라지 않는다. 죽음은 생물학적인 필요 때문에 삶에 꼭 달라붙는 것이 아니다 ㅡ 시기심 때문에 달라붙는다. 삶이 워낙 아름다워서 죽음은 삶과 사랑에 빠졌다. 죽음은 시샘 많고 강박적인 사랑을 거머쥔다.

하지만 삶은 망각 위로 가볍게 뛰어오르고, 중요하지 않은 한두 가지를 놓친다. 우울은 구름의 그림자를 지나칠 뿐이고. 그 백인 남학생은 '로즈장학위원회'에서 장학금을 받았다. 난 그를 좋아한다. 그가 옥스퍼드에서 풍요로운 경험을 누리길. 부의 여신인 라크시미가 어느 날 내게도 행운을 듬뿍 내려준다면, 옥스퍼드는 다섯번째로 가고 싶은 도시다. 그보다는 먼저 메카, 바라나시, 예루살렘, 파리에 가보고 싶다.

직장생활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그저 넥타이가 올가미고, 거꾸로이긴 해도 조심하지 않으면 목이 졸릴 거라는 것밖에.

캐나다를 사랑한다. 인도의 열기와 음식, 벽을 타고 오르는 도마뱀, 은막 위에서 펼쳐지는 뮤지컬, 거리를 거니는 소, 까악대는 까마귀 떼, 크리켓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립지만, 캐나다를 사랑한다. 캐나다는 너무 추워 정신을 차리기 힘든 대단한 곳이고, 헤어스타일이 제멋대로인 선량하고 지적인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어쨌거나 폰디체리에는 내 마음이 젖어들 만한 게 없다.

리처드 파커는 쭉 나와 함께 있었다. 그를 잊어본 적이 없다. 보고 싶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 보고 싶다. 지금도 꿈에서 그를 본다. 주로 악몽이지만, 사랑이 얼룩진 악몽이다. 사람의 묘한 심리다. 어떻게 그렇게 불쑥 날 버릴 수 있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작별인사도 없이,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훌쩍 가버렸을까? 도끼로 쪼개는 것처럼 가슴이 아프다.

멕시코 병원의 의료진은 믿지 못할 정도로 내게 친절했다. 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암 환자나 교통사고 환자들이 내 소문을 듣고는 휠체어를 밀며 모여들었다. 보호자들까지 모여들었다. 영어를 하는 사람이 없고 나는 스페인어를 못 하는데도. 그들은 미소를 보내고, 손을 잡고, 머릴를 쓰다듬어주었다. 내 침대에 음식과 옷가리를 놓아주기도 했다. 그들 때문에 난 참지 못하고 웃음과 울음을 터뜨렸다.

이틀쯤 지나자 설 수 있었다. 어지럽고 메스껍고 힘이 없었짐나, 두어 발 뗄 수 있었다. 빈혈에다, 나트륨 수치가 너무 높고 칼슘 수치는 너무 낮다는 혈액검사 결과가 나왔다. 몸에 액체가 고여서 다리가 퉁퉁 부었다. 몸에 코끼리 다리를 붙여놓은 것 같았다. 소변은 샛노란 색이었다가 점차 갈색으로 변했다. 일주일쯤 지나자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고, 끈까지는 못 묶어도 구드를 신을 수는 있었다. 어깨와 등에 상처가 남아 있었지만 피부는 나았다.

처음 수도를 틀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살이 쏟아지는 데 놀라, 몸이 흐물흐물해져 털썩 주저앉았다. 간호사의 품에서 기절해버렸다.

캐나다에서 처음 인도 식당에 갔을 때 나는 손으로 밥을 먹었다. 웨이터가 못마땅하게 바라보면서 "지금 막 배에서 내렸나보군요?"라고 했다. 나는 허옇게 질렸다. 조금 전까지도 음식을 음미하는 미뢰였던 손가락이, 웨이터의 눈길에 더러운 게 되어버렸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죄인처럼 손가락을 얼어 붙었다. 감히 손가락을 쭉쭉 빨 수가 없었다. 난 죄지은 듯 냅킨에 손을 닦았다. 웨이터는 그런 말이 내게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 몰랐다. 살에 못을 치는 것 같았다.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런 도구는 써본 적이 없었다. 손이 떨렸다. 삼바가 맛이 없어졌다.

 

ㅡ 와 이 정도 길이의 글을 옮겨 쓴 적은 처음이다. ㅡ 1에 해당하는 이 글은 나무늘보 이야기로 쿡쿡 웃게 만들더니(나무늘보 대박) 여기 저기 왔다 갔다하는 이야기로 날 혼란스럽게 했다. 갑자기 "리차드 파커"란 이름이 나오더니 병원으로 공간이 옮겨진다. 이야기를 다 읽은 나는 이제야 이 첫 이야기를 읽고 그의 마음을 헤아린다. 리차드 파커는 나빳다.

모니터 안에서 인도와 한국이 축구 경기를 하고 있다. 주인공 파텔도 저 인도 사람과 같은 생김새일까? 경기는 지금 3:1이다. 이대로 끝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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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이란 무엇인가 - 10점
채운 지음/그린비

좋은 하나를 소개하려합니다. 그린비 출판사의 개념어 총서 시리즈 1권인 "재현이란 무엇인가" 책입니다. 책에서 말하는 사고를 많이 접해본 사람에게는 그저 평범한 책으로 다가올 있겠지만 제게는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전에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읽었을 때도 이와 비슷한 떨림을 느꼇지만워낙 책이 어려워 떨림이 무엇에서 시작되는지 함부로 말하기 어려웠는데 책은 쉽다는 미덕을 갖추고 있어 지금 내게 맞는 책이 되어주었습니다

, '재현'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재현적 사고'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뭔지 말하기 전에 1 전쯤 회사 사장님과 나눈 대화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 여자친구를 사귀지 않지?"

"글쎄요, ... 아마도 제가 원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런것 같아요."

"네가 원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그다지 이쁘지는 않아도 되지만 , 피부가 깨끗했으면 좋겠고,  웃는 모습이 이뻣으면 좋겠고, 자기 주관이 뚜렸했으면 좋겠고, 너무 현실적이지 않았으면 좋겠고... 주절 주절"

"그래? 그런데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네가 그리는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영화나 소설에서 보면 일생 한명은 만날 있다던데요?"

"그건 영화니까. 소설이니까. 네가 마음 속에 그린 이른바 이상형이란 어쩌면 실재하지 않는 '로보트'인지도 몰라. 마음 속에 네가 원하는 사람의 모습을 하나 하나 붙여 로보트를 만들고 로보트를 사랑하는거지. 그런데 로보트란 결국 자신이 그린 것이고, 그것으로 시작된 사랑은 타인에게로 깊숙히 뻗어나가기 어려워. 타인에게로 향해야할 사랑이 자신에게로 치우치는 거지. 분명한 것은 로보트와 일치하는 사람은 없다는 거야. 로보트와 닮은 사람을 만났다 해도 멀지 않아 네가 그린 형에서 벗어난 모습을 찾아낼 것이고 그것이 마음에 짐을 수도 있지."

"..."

"때문에 중요한 것은 마음 속에 이미 자리잡은 '이상형' 모습을 하나 하나 지워나가는 거라 생각해. 그러면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있을거야."

 

좋은 조언이죠? 재현적 사고란 사장님게서 꾸짖은 생각의 모습입니다. 사랑할 사람의 상을 미리 마음에 그려놓고 그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 넓게 보면 마음 속에 어떤 완벽한 상을 그려놓고 그것 대로 살아가려하는 . 이것이 재현적 사고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냐면 하나 하나 소중한 삶의 방향을 '이래야 한다. 이러면 안된다'라고 성급히 규정 짖고 삶의 옳고 그름, 선과 악의 경계선을 긋 때문입니다. 문제되는 사실은 '무엇을 재현한다.?'라는 문장에서 목적어인 '무엇' 자기 자신이 정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쩌면 사회와 종교 또는 미디어로 부터 받은 억압과 교육의 찌꺼기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당신이 꿈꾸는 사랑의 모습은 온전히 자신이 만든 것입니까? 혹시 아름 다운 영화나 소설이나 종교의 경전을 보고 "저게 바른 사랑이야, 사랑은 저래야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닌지요? 더욱 문제되는 것은 영화, 소설, 종교의 경전이 말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이 현실의 자기 모습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지 않아도 의심을 하게 것이고 혹은 그것으로 죄의식을 느낄 지도 모릅니다. 속으로 말하겠죠. "이건 내가 꿈꾸는(사실 남이 그려줬을지도 모르는) 삶의 모습이 아니야." " 사랑은 이러지? 사랑은 온유하고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는 것이라 했는데 이러지?" 이런 식의 사고는 삶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장애물이 됩니다. 낙타의 삶이죠

 

"인내력 있는 정신은 이와 같은 모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짐을 싣고 사막을 달리는 낙타처럼 정신의 사막을 달린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한가지. 재현적 사고는 다른 이를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게 합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그려놓은 완성된 삶의 잣대로 자신을 포함한 개인 개인을 줄세우는 것이죠. 그후엔 자기보다 뒤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우월감을 느낄 것이고 자신보다 앞서있는 사람을 보면 열등감을 느낄 것입니다. 마음 속에서 그려놓은 완성된 삶의 모습을 한번 지워볼까요? 줄세워진 사람들은 모두 뿔뿔히 흩어져 우주의 별과 같이 개인 개인으로서 아름답지 않습니까

 

지금 제겐 어울리지도 않는 말들을 너무 많이 했네요. 애교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이제 이상 나름대로의 감상을 말하는 것은 그만두고 좋은 책의 머릿말의 일부를 여기 옮깁니다.

 

 

. 머릿말_ 디렉현,

인어공주의 비극

어린 시절에 한때나마 인어공주의 비극에 눈물을 흘린 적이 있던가... 모르겠다. 가지 분명한 , 도무지 그녀의 사랑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인어공주의 비극은 왕자가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왕자가 잘못했나. 인어공주는 사랑의 힘을 삶의 힘으로 전환시키지 않았으며(인어공주가 능동적으로 선택할 있는 유일한 행위가 '죽거나 죽이거나'라니!), 자신의 사랑을 '행위' 책임지지 않았으며(언어를 스스로 포기해 놓고 대체 생면부지의 왕자와 어떻게 소통을 한단 말인가! 설마 미모로?), 자신이 만든 사랑의 상을 현실에 투사해 놓고는 망상 속에서 허우적거렸다(내가 인간이 되면 왕자님도 사랑하지 않을까? 맙소사!) 됐지만, 인어공주의 비극은 스스로가 자초한 거다. 그게 사랑의 본질이든 뭐든, 아무튼 허무한 비극에 도무지 공감할 없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벼랑위의 포뇨' 인어공주의 비극을 완벽하게 전복한다. '물고기' 포뇨는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 포뇨의 인간-되기는 마법이나 사랑의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상 밖으로의 모험에서 시작된 . 파도에 휩쓸려 포뇨는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소스케에게 발견된다.

소스케는 속에서 파닥거리는 포뇨를 구해 주고, 포뇨는 병을 깨다가 손을 베인 소스케의 상처를 햝아 그의 상처를 치유해 준다. 이보다 가슴 찡한 만남이 있을까.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만남.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수몰된 세계를 항해하고, 어두운 터널을 함께 통과하는 사랑. 포뇨와 소스케는 사랑에 대한 어떤 선험적 상도 없는 상태에서 모험을 통해 사랑을 배워가고 구성해간다. 소스케의 마음이 변하면 포뇨 역시 물거품으로 변해야한다. 하지만 포뇨 엄마의 말처럼, 그러면 어떠한가. "우린 원래 물거품에서 태어났는데요, !"

"당신은 포뇨가 예전에 물고기였다는 알고 있나요?"

"."

"포뇨는 당신의 피를 먹고 인어가 됐어요."

"그랬구나. 아줌마! 포뇨가 손에 상처를 낫게 해줬어요. 그래서 인어가 거예요!"

"그래요! 그런데 당신은 포뇨가 인어라도 상관없나요?"

", 물고기 포뇨도, 인어 포뇨도, 인간 포뇨도 전부 좋아해요."

인간, 물고기, 인어 따위의 규정을 벗어난 범우주적 사랑! 다섯 살짜리 꼬마들은 쑥쑥 자랄 것이고 변할 것이고 죽을 것이다. 그들의 사랑 또한 성장하고 변화하고 언젠가는 소멸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사랑의 비극이 수는 없다. 그게 비극이라면 자체가 영원한 비극일 .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어공주의 비극에 맞서서, 물에 잠긴 묵시론적 세계 속에서 사랑을 구성하는 자들의 사랑을 사요한다. 그들이 -래의 세계를 구성할 것이고, 그들의 사랑이 세계에 다른 풍경을 선물할 것이다. 사랑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어떤 모델도 없이 사랑하라!

 

독화살

...

재현은 "삶의 운동에 대항하여, 삶의 운동을 발명하는 즐겁고 다양한 방법에 대항하여 파괴적으로 반응" 한다는 점에서 파시즘을 닮아 있다. 일말의 차이도 용납하지 않는 파시즘처럼 재현 역시 동일성의 체계로부터 달아나는 모든 힘들에 대해 극도로 히스테리컬하게 반응한다. 재현의 세계에서는 체계에 구멍을 내는 , 동일성에 가해지는 작은 흠집 하나도 죄악이다. 일차적인 것은 중심, 규범, 척도요, 낯선 , 지류, 차이는 예외적인 것으로서만 허용된다. 파시즘은 정치 형태가 아니라 욕마으이 형태, 사유의 형태다. 완전한 사랑, 완전한 , 정합적인 세계를 꿈꾸는가? 어쩌면 당신은 파시스트일지도

 

걷기

...

재현은 고체 상태의 세계를 꿈꾼다. 각이 들어맞는 단단한 육면체들의 세계. 걸으면서, 걸음과 함께 펼쳐지는 여러길들이 있는 세계가 아니라, 어딜 가든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 세계. 재현은 주어진 구조에서 출발한다. 표준, 평균치, 원점에서. 구조 밖으로 이탈하는 , 기원 없이 시작하는 , 정처 없는 산책을 용납하지 않는다. 위에서 벌어지는 우연한 만남과 사건을, 포뇨의 대책 없고 목적 없는 사랑을, 거위의 위에의 비행을

주어진 안에서 평균적인 욕막을 갖고 다수적 개념을 재현하기를 강요하는 재현의 세계에는 길이 별로 없다. 많은 이들이 걷는 개의 뻔한 말고는. 하지만 사유와 , 그리고 예술은 언제나 길을 잃음으로써 시작되는 것이 아니던가. 디렉션 . 집으로 가는 , 없음, 막다른 골목, 혹은 여러 갈래 . 위에서, 알몸인 채로, 재현과의 전투를 시작해보자

 

 

아ㅡ 좋다. 좋은 글이다. 고마워요, 채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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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굴레에서

즐거운 책 이야기 2010.08.11 01:02 Posted by 아일레프
인간의 굴레에서 1 - 6점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민음사

인간의 굴레에서라고 쓰고, 밀드레드의 굴레에서 라고 읽는다.
 
밀드레드가 나오는 부분만을 너무 집중도 있게 읽어서(분명 책을 읽는 내 눈동자는 분노에 차 있을 것이다.) 나중에 다시 한번 읽어야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가 훨씬 더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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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동쪽

즐거운 책 이야기 2010.08.04 14:22 Posted by 아일레프
에덴의 동쪽 1 - 10점
존 스타인벡 지음, 정회성 옮김/민음사

벽돌같은 권의 책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3대에 거친 가족사. 서사의 탁월함은 책을 놓을 없게 만든다.

그리고 장엄한 마지막 장면. 글로 쓰여졌지만 앞에 생생하게 다가온다.

좋은 책을 만났다는 것은 이토록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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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 1 - 10점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창식 옮김/열린책들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보통 책을 읽을 때 문장에 줄을 많이 긋고, 많은 메모를 하는 편이지만 마지막 장을 넘긴 후에도 이 책은 깨끗했다. 명문과 가슴을 울리는 장면이 없어서가 아니다. 무서우리만치 강력한 소설의 흡입력이 펜을 들 시간을 감히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잔차키스는 예수의 시대에 벌어진 사건이 2000년 전의 것만이 아님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책은 오늘날 또 다시 벌어지고 있는 그 예수의 시대 앞에 나를 서게 한다. 이 곳에서 나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일까? 우리는 과연 진실로 성장해 죄 없는 이의 못박힘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질서의 수호인가 사랑과 정의인가

난 이 화두가 오늘날에만 존재하는 것인양 착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것은 꽤나 오래된 주제였나보다. 그리고 사랑, 정의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논리도 지금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랑과 정의라는 주제가 바로 사회 주도층에서 주도해 만들고 심어놓은 생각이라는 점에 있다. 그들의 제국에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교만과 시기 질투 보다는 사랑과 관용, 정의가 우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배층들이 원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키는 사랑과 정의이다. 그저 고만 고만한 사랑과 정의를 묵상해야 이 땅에서 그럭저럭 칭송받으며 부와 명예를 지킬 수 있다. 포티스 사제가 나타나기전 리코브리시 마을 사람들이 그랬다. 그 정도의 사랑과 정의만으로 세상은 평화롭게 흘러갔고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포티스 사제가 이끄는 피난민들이 그들에게 나타나자 상황이 조금 틀려졌다. 그들은 부끄러운 사람이 되었다. 사랑과 정의의 메시지의 큰 목소리는 그들에게 행동의 불을 지필만한 동인이 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어느 누가 나서서 맘 속에서 불타려하는 작은 불꽃을 잠재워주기를 빌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타락한 사제와 탐욕스러운 부자의 편에 자기도 모르게 서고야 만다.

 

이 세상은 네개의 기둥위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믿음과 조국과 명예, 다음으로 네 번째 위대한 기둥이 재산이다. 그것에 손대지 마라! 신은 당신의 숨겨진 법에 따라 부를 분배하신다. 신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는 별개이다. 신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만들었다. 질서를 방해하는 그에게 화 있으리라. 그는 신의 뜻을 거역하고 있다.!그레고리 사제의 목소리

 

그나마 그레고리 사제가 솔직해서 저 꾸밈없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에 다행이다. 이 순간 그는 신의 제자가 아니다. 이 세상의 수호자일 뿐. 신의 거룩한 말씀, 그가 밑고 따르는 예수의 거룩한 메시지는 오직 믿음, 조국, 명예 그리고 재산을 지킬 수 있을 경우에만 유효하다고 하는 그의 말은 요즘 여기저기서 심심찮게 들려와 전혀 새롭지 않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세상의 질서에 거슬러 교리, 경전, 율법 따위가 아닌 순수한 예수의 사랑의 메시지에 반응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뒤엎어 버릴 만한 그 메시지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자신과 투쟁하며 삶의 모순을 지우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의 삶을 어느새 닮아버려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 마놀리오스, 베드로 야나코스, 오오, 집정관의 아들이라는 명예와 재산을 내팽겨친 미켈리스. 그들은 타락한 세상의 질서에 맞서 거룩히 투쟁한다. 볼세비키라는 누명을 덮어 써도(오늘날 좌파라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폭동자란 어이없는 말을 들어도 이 세상에 하늘의 법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승리가 보이지 않는 투쟁을 계속해간다.

 

<왜 이곳의 삶 때문에 분투해야 하는가? 이 세상이 나에게 중요하기나 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