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YD vs 젠틀맨

끄적끄적 2014.08.13 21:49 Posted by 아일레프


약자에 대한 폭력을 다루는 법, 한국과 미국 방송의 차이 글을 통해 WWYD 보게 되었고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 감동은 나로 하여금 한국 자막과 함께한 WWYD 모두 찾아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후 프로그램을 모방한 한국의 젠틀맨을 YouTube에서 찾아보았다. PPSS 글처럼 젠틀맨이 편견을 조장한다고 느끼진 못했지만 분명 WWYD 젠틀맨은 차이점이 보였다WWYD으로 감동을 느꼈으나 젠틀맨을 통해선 그럴 없었다. WWYD를 본 뒤에는 생각에 잠깐 잠기기도 했으나 젠틀맨을 본 뒤에는 그딴거 없었다.

 

그랬을까? 같은 형식의 프로그램인데 그런 것일까?

 

그것을 '대화' 유무에서 찾는다. WWYD에서는 대화가 있으나 젠틀맨에서는 대화가 없다. WWYD에서는 시민들의 생각과 철학을 그들의 말로 느낄 있으나 젠틀맨에서는 시민들의 '' 느낄 있을 뿐이다. 그럴까? 미국에선 토론을 접할 일이 한국보다 많기에 그런 것인가? 한국인은 조곤조곤 말을 하는 것보다 화를 많이 내는 민족이라 그런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WWYD이 시민들의 참여만이 아닌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WWYD 배우는 마치 훈련받은 사회자와 같은 대사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이유를 말한다. 

 

"제가 잘못된 생각을 하는 건가요?"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전 .... 라고 생각해요"

 

결과 WWYD 속에서 시민은 화가 와중에도 자기 생각을 펼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약자와 차별받는 사람들의 권리에 대해 논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그것을 보는 우리도 주제에 함께 참여해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배우를 꾸짖는 것뿐 아니라 조심스레 설득하는 목소리를 WWYD 통해 들을 있고, 또한 그들에게 설득되고 감동을 느낄 기회를 얻는다.

 

WWYD 달리 젠틀맨 속의 배우는 시민의 생각을 묻는 대신 한껏 높아진 목소리 톤으로 시민들의 화를 돋운다.

 

"내가 못된 사람이란 거에요?!"

"내가 잘못한 거에요?!"

 

결국 시민과 젠틀맨을 보는 우리가 얻을 있는 것은 '' 내거나 시민과 같이 '어이없는 표정' 지을 기회 뿐이다.

 

젠틀맨은 WWYD 같이 만들면 우리 사회에 생산적인 담론을 끄집어낼 있는 좋은 통로가 있다. 우리 사회에도 미국의 인종차별, 동성애 등과 비견할 만한 충분한 이슈들이 넘친다. 그러니까, 결론은, 모방하려면 제대로 모방하자. 채널 A 에게 이건 너무 무리한 요구인가? 그래도 애써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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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표. 보육교사 공약에 대해.

끄적끄적 2014.05.21 10:10 Posted by 아일레프

2014 6.4 지방선거를 앞둔 지금경기 도민인 나는 서울 시민이 매우 부럽다누구를 선택할지 결정하는 것이 너무나 쉬워 보이기 때문이다그곳에서  곳은 더욱 희어지고 있고검은 곳은 스스로를 검게 칠하고 있으니흑백을 가려 지지할 후보를 선택하는 것은 너무 쉬워 보인다허나 경기도는 그렇지 않다까다롭다야당을 응원하는 내가 여당의원같은 야당의원 김진표에게 한표를 던지기가  개운치않기 때문이다.

 

김진표는 과가 있는 인물이다선대인 그의 과를 지속적으로 지적해  것으로 유명하다사실 내가 가진 그의 어두운 이미지는 상당부분 선대인으로 부터  것이다대표적인 그의 과실 또는 논란거리는 위키  정리되어 있다내가 심히 불안한것은  논란거리들에해당하는 행동의 근거와 명분을 찾기 어렵다는 것과그가 이것에 대해 명확한 해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매우 불편한 사실이다. (해명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과 달라 취소선을 그었습니다. 인터뷰가 있는데, 들어봐야겠군요) 

 

게다가 이번에 그가 발표한 보육교사 전면 공무원 전환 공약은 어떤가? '좋은 보육' 대한 필요성은 대부분의 국민들이 공감한다그러나보육교사를 공무원으로 전환하면 '좋은 보육' 실현되는가아니단계적으로 보육교사를 공무원으로 전환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것인가예산 비용은 얼마인가이렇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질문들에 대해 그가 명확히 답변하고 있지 않아 매우매우 실망스럽다

 

남경필이  질문들을 토론 중에 했는데 귀에는 남경필의 질문이 합리적으로김진표의 답변은 질문의 본질을 회피하는 것으로 들렸다. (http://news1.kr/articles/1684582)

토론  나왔던 발언들은 아래와 같다.

 

 

 

 : 도내 공무원이 5만명을 밑돈다는 남 후보의 지적은 틀린 것으로 국공립교사 9만명, 사립교사 2만명 등 총 11만명의 교사가 있다. 새누리당도 무상보육에 10조 투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7만명의 공무원화는 문제가 없다.

 

 :  공약은 철회하는 것이 맞다. 보육교사 10만원~15만원 지원해 처우 개선하는 것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공무원화는 어려운 것이다. 이에 따른 급여만 연간 약 1조3000억원이 든다. 전문가들은 2조가 들지, 얼마가 들지 모른다고 한다. 표를 얻기 위한 졸속공약이다.

 

 :  후보는 15일 보육은 국가 책임으로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후보 말대로 많은 예산이 들지만, 교육자의 자질을 높이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 공무원 만들어 준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예산 따지지 않고 공약했다면 포퓰리즘이다. 경제전문가인 김 후보가 예산을 따지지 않고 공약한 것은 잘못이다.

 

 : 대강 사업에 27조원 쏟아부은 새누리당이다. 학부모들에 보육 부담을 떠넘겨 출산율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 국가가 부담해야 할 예산을 부담하지 않아 경기도지사가 추진하려 하는 것이다단계적으로 공무원화로 학부모 만족도를 높이고, 2019년 국가 경제규모가 커지니까 당연히 8조원은 국가가 부담할 수 있다.

 

 : 사회복지사도 1만8000여 명에 달하는 데 보육교사 공무원화는 사회 갈등을 조장하는 공약이다. 지금이라도 공약 철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 후보가 교육부총리 시절에는 왜 추진하지 않았는지 진정성에 의문이 든다.

 

 : 교육부총리 시절 계속 말하고 추진하려 했다. 당시 유치원교사 월 10만원 지원을 처음 시작했고 이것이 밑거름돼 현재 유치원교사 50만원, 어린이집교사 30만~40만원 지원이 시행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생각하는데보육교사를 공무원으로 전환하면 교육자의 자질이 저절로 높아지는 것인가유치원 교사어린이집 교사에게 금액을지원한 것은 매우 잘한 것이나금액 지원차원에서 공무원 전환 추진으로 '도약'하려는 근거와 명분은 과연 무엇인가갑작스럽게 4대강을 언급하는 것은  그런 것인가? 4대강을 언급하면 모든 공약을  실현할  있다. 4대강은 극악이기 때문에 그것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공약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남경필의 질문이 매우 합리적이라 생각하며 김진표는 이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해야만 하고그에 대한 해답을 자신 안에서 찾을  없다면  공약은 마땅히 철회해야만 한다.

 

야당 지지자는 콘크리트가 아니다우린 당신을 검증할 것이고 검증에서 당신이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면 당신이 새누리당원이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당신에게 표를 던지지 않을 것이다이점을 김진표, 당신이 명심했으면 좋겠다당신에게 투표하는 손이 부끄럽지 않을 있도록 거짓없이 진실되게 공약을 만들고떳떳하게 승리하기 바란다부탁이다



---> 이 글과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글이 있어 추가 합니다. 이 글을 보신 분들은 우리아이 보육, 김진표의 생각과 남경필의 생각 도 함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남경필 "보육공무원? 돈있나" vs 김진표 "4대강보다 낫다" 이것도 함께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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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비교

끄적끄적 2014.02.25 10:15 Posted by 아일레프
  1. 자기계발서는 자본을 섬기라 하고, 기독교는 신을 섬기라 하지만 강신주는 스스로 주체가 되라 한다.

  2. 자기계발서, 기독교, 강신주는 개개인을 변화시켜야 대상으로 본다.

  3. 자기계발서, 기독교, 강신주 모두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제시한다.

  4. 자기계발서, 기독교는 세상을 긍정하라 하고 자신을 부정하라 하지만 강신주는 자신을 긍정하라 한다.

  5. 기독교와 자기계발서는 개인보고 착하게 살라 하지만 강신주는 착하게 살지 말라 한다.

  6. 자기계발서, 기독교, 강신주 모두 뭔가를 물어보면 정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한다.

  7. 자기계발서, 기독교는 자본주의를 긍정하나 강신주는 자본주의를 저주한다.

  8. 기독교와 강신주 모두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댄다. ( 아니면 도다)

  9. 기독교와 강신주는 사람들의 모든 행동에서 위선을 발견하고, 그것을 깐다.

  10. 기독교와 강신주 모두 자기가 하는 말이 무조건 옳다 한다.

  11. 기독교와 강신주 모두 일종의 회계를 유도한다. 청중은 회계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12. 몇몇 멘토들과 목사들, 그리고  강신주는 싸가지 없게 말하고, 청중은 그것으로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13. 기독교는 회계한 개인에게 신이 있기에 괜찮다고 말하고, 강신주는 스스로 일어날 있는 힘이 자신에게 있다 한다.

  14. 기독교의 목사는 신도가 자신을 따르길 원하지만 강신주는 청중이 자신을 마침내 버리길 원한다.

  15. 자기계발서, 강신주 책이 서점에 많다.

  16. 자기계발서에는 저자의 성실함과 피냄새가 보이지 않는다. '최근의' 강신주 책에는 피냄새가 나지 않는다.

  17. 자기계발서는 병신같고,  기독교 서적은 펼치기도 괴로우며, 강신주 책은 때때로 훌륭하나 때때로 성의 없다.

  18. 연습하면 자기계발서는 누구나 있는 책이나 강신주 책은 그정도 까지는 아니다.

  19. 자기계발서, 기독교는 대놓고 강자를 편든다. 강신주는 약자를 편들지만 강신주 논리를 강자가 사용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20. 자기계발서, 기독교 목사들은 대놓고 거짓말 쟁이들 이지만 강신주는 내적 모순이 없으려 애를 쓴다. 허나 어쩔 없이 내적 모순이 있다.

  21. 자기계발서 저자, 힐링서 저자, 기독교 목사, 강신주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22. 강신주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강신주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므로 그러지 말자.

  23. 자기계발서, 기독교는 까야 제맛이다. 강신주는 아직까지 이용가치가 높으므로 적당히 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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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강신주
  1. 세상을 설명하는 하나의 단순한 원리, 또는 법칙을 만들어라. 
  2. 세계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누고 우리들은 굳건한 선의 자리에 있음을 내내 확인 시켜라. 반대로 세상은 악으로 설명하라. 
  3. 1과 2에 의해 기존의 모든 종교를 설명할 수 있도록 논리를 만들어라. 
  4. 종교 내에서 다툼이 있거나 교리 내의 모순이 있다면 우리도 세상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삼! 이라고 말하며 얼버무려라. 
  5. 선과 악을 구성원 스스로 구분짓지 못하게 하라. 
  6. 종교의 경전을 읽기 쉽게 하되, 해석의 가짓수가 무궁무진 할 수 있도록 하라. 
  7. 종교 경전 해석의 권위는 종교 지도자가 갖도록 하라. 구성원이 해석 못하게 해야 한다가 아니다. 다만 지도자의 해석이 구성원의 해석보다 무조건 높다는 뜻이다. 
  8. 7로써 삶에 존재하는 딜레마 해결 방법을 종교 지도자가 마련하게 하고, 그것을 절대적으로 따르게 하라.   
  9. 너~무 높아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실현 시킬 수 없는 목표를 제시하라. 
  10. 종교 구성원이 죄책감을 가지게 하라. 9이 가능하다면 종교 구성원을 매번 죄책감에 시달리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원죄는 정말 대박이다.)
  11. 10이 가능해졌다면 이제 그 죄책감을 적절히 해소 시켜줘라. 일종의 채찍과 당근인데, 명심해라. 채찍과 당근에서 더 중요하고,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것은 채찍이다. 
  12. 긍정적 사고를 가르쳐라. 이것으로 변화와 개혁의 초점을 사회가 아닌 오직 개인에게 맞추게 하라. 
  13. 마지막. 개개인을 노예로 살게 하라. 절대 주인되지 않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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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종교

진중권 vs 간결 토론 시청 후기

끄적끄적 2012.10.30 10:28 Posted by 아일레프

어제 실시간 검색어에 진중권이 있는 것을 보고 진중권과 간결이란 분이 토론한 영상을 보았다. 프로축구선수와 갓 축구를 접한 아이가 대결하는 축구시합을 보는 듯 정말 상대가 안되게 진중권이 속된말로 간결이란 분을 밟았다. 이것을 보고 느낀것이, 실력이 비등 비등한 상대가 겨루는 것을 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실력의 차이가 크게 벌어지는 사람 간의 시합을 보는 것도 엄청난 새디스트적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다.(물론 당하는 쪽이 나의 반대편에 서 있을 경우에만 성립하겠지만) 또 하나 알게 된 것은 실력에 격차가 있는 상대의 겨룸을 보는 것도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1. (
진중권 말로) '프로'가 토론을 대할때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깜짝 놀란 부분은, 간결이 정수 장학회의 이사장 임명권을 교육감이 가진다고 말했을때 진중권이 바로 네이버 백과사전을 인용하며 간결이 알고 있는 팩트를 수정해준 장면이었다. 영상을 보아 진중권은 실시간으로 네이버 백과사전을 검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만약 실시간으로 검색했다면 이 글이 뻘짓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중권은 토론전에 정수 장학회의 이사장 임명권을 누가 가지고 있는지 - 이 사소해보이는 -를 검색해보고 나왔다는 것이다. 토론이란 1차적으로는 팩트의 싸움이기 때문에 토론자는 많이 자료를 얻고 머리속에 충분히 숙지한 후 무대에 올라간다. 그들에게 팩트의 양과 질은 전쟁에 참전하는 병사의 총알과도 같은 것이다. 진중권이 토론에서 사뿐히 승리한 이유는 일단 말빨이 좋은 것도 있겠지만 원체 아는게 많은 양반이고, 그런 양반이 간결보다 더 많이 준비를 하고 무대에 올라왔다는 것에 있다. 





2. '
프로'가 토론을 대할때 상대방 말과 상대방의 논리를 찾는 것에 많은 기운을 쏟는 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귀가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상을 보라. 진중권은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는데, 상대는 진중권이 말할때 자신이 말할 부분을 찾는 것 처럼 보인다.(인터넷으로 도움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1차적으로 토론이란 팩트의 싸움이기에 총알의 양과 질에서 승부가 결정되는 경우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경우 싸움은 대부분 판정승 정도로만 승패가 결정되지만 결정적인 KO승은 상대가 상대방의 논리에 의해 스스로 자멸 할때 나온다.(이 영상에서는 이런 장면이 크게 2번 나온다.) 이것은 자기가 자신의 총으로 스스로를 쏘는 격이고 이 상태에 빠지면 그야말로 멘붕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려면 졸라- 잘 들어야 한다. 이는 상대방의 무기가 뭔지 잘 알아야 그 무기를 상대에게 향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상은 이것을 가르쳐 주었다. 반대로 자신이 이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면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이 토론에서 사용할 무기가 무엇인지를 아껴두어야 한다. 이 토론이 이렇게 끝난것은 토론 내의 요소도 있겠지만 토론 전에 자신의 무기가 뭔지 훤히 보여줬다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는 인내심이 너무- 없었다. 그는 진중권의 약점을 알고 있다고 자신했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맙소사, 그것을... 공개해버렸다

흥미로운것은 진중권도 토론을 시작된 후 바로 자신이 꺼내들 무기를 언듯 보여주었다는 것에 있다. "당신들이 문제삼은 것이 이것이고 나도 그것을 인정한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하면 당신들은 더 큰 위기에 봉착한다." 허나 간결은 그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진중권에게 강의식으로 말하지 말라면서 자기 할말을 한다. 그때 간결은 진중권이 말을 계속 하게 하면 안된다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 큰 실수였다. 사회자가 끊지 않는한 사람말을 끝까지 듣는게 좋다




3.
실수에 대한 인정은 빠르면 빠를 수록 좋다.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빠르게 자신의 의견을 버려야 한다. 바둑에서는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심지어 대마도 죽인다.(물론 다른 큰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한 경우에만) 그리고 자기가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겁나 빠르게 돌을 던져 자신의 패배를 보인다.(기권이란 제도는 패자를 위해 있는 것이다.) 진중권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라. ~하게 인정한다. "맞아요, 그건 내가 잘못 알고 있었어요." So Cool! 그러나 그는 더 큰것을 얻어왔다. 코딱지를 내주고 살점을 얻어왔다. 반면 간결은 어떤가?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계속 끌고 간다. 맞지 않아도 될 매를 계속 맞는다.(아 보는 사람이 힘들어 그만해 그만해!!) 이럴 필요 없다. 질것 같은 부분은 빨리 버리고 에너지를 충전해놔야 한다

 

, 여기서 또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살을 주고 뼈를 얻기 위해 프로가 자주 함정을 설치한다는 것이다. 이런걸 덥석 물지 않기란 굉장히 어려운 것이어서 많은 참을성이 필요하다.(일단 인간은 허영심이 가득하니까.) 이런 참을성을 기르려면 2번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상대의 말을 잘 듣고, 큰 싸움이 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진중권은 이것을 간결에게 명백히 보여줬다.




이것은 다른 것인데, 진중권이 나꼼수를 왜 경계하는지 알게 되었다. '소설'쓰지 말라는 것이다. 현재 나와있는 사실로도 공격할 거리가 무궁무진한데 왜 소설을 써서 - 팩트가 아닐 수도 있는 사실을 말해서 - 자기 편의 약점을 만드냐는 것이다. 상대편의 패배를 보니 그것의 위험성을 알 것 같다. (물론, 나꼼수는 자신들이 소설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지점에서 간결분과 차이점을 보인다.)



여튼 60분여 되는 영상을 보며 시간이 금방 갔다. 진중권님보다도 간결님에게 참 감사하다. 일단 간결은 용기가 있었다. 그 용기는 참으로 갖기 힘든 것이다. 그리고 간결은 자신이 이 싸움에서 졌다는 것을 알 정도의 지성은 있었다. 그정도의 지성을 갖춘 사람도 많지 않다. 이제 후폭풍을 이겨내면 아마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도 본다.(학력도 좋고, 생기기도 잘 생겼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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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의 사랑, 강자의 사랑

끄적끄적 2012.01.09 12:30 Posted by 아일레프


어떤 사람들은 나약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얻고자 직접 실행에 옮길 수 없다
. 이것을 나약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실행에 옮길 없는 가장 이유가 자기 방어 심리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거절 당했을 느껴지는 비참함을 감당할 만큼 그들은 강하지 못하다. 때문에 그들은 그냥 기다릴 뿐이다.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고 나아가 자신을 좋아하고 사랑해 이성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 이성이 내게도 마음에 들기를 그저 기다릴 뿐이다. 기다림 끝에 어떤 이가 나타나 자신에게 호감을 표한다고 해도 또는 그녀가 자신을 진정 좋아하는지 확신이 서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근본적으로 약하며, 또한 그렇고 내가 보는 많은 사람들도 범주에 든다.

 

그런데 때때로 강한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은 자신을 좋아해줄 누군가를 찾기보다 자신이 좋아할 누군가를 찾는다. 그리고 그 또는 그녀를 발견 했을 때 실행에 옮긴다. 때문에 그들은 강하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가질 있고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사랑을 받을 있다고 감히 믿는다. 이 강한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호감을 받을 수 있는 형태로 굳이 변경하거나 꾸밀 필요가 거의 없다. 다만 그들은 찾을 뿐이다. 마치 찾기만 하면 그 또는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듯이 찾는다.

 

강한 이가 자신을 꾸밀 필요가 거의 없는 반면 약한 이들은 자신을 꾸며야 하고 남에게 호감 있는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억제해야 하고 때로는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 사회가 원하는 틀에 들어갈 있도록 자신의 모습과 색깔을 바꾼다. 때때로 그들은 이러한 행동을 "준비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짝을 많이, 빨리 만나는 그들 최고의 전략이다.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예쁘게 꾸며 놓은 뒤 그들은 기다리고 기다린다. 자신의 정성스런 치장에 넘어올 하나의 이성을.

 

내가 약자, 강자로 이 형태를 분류한 이유는 약자가 수동적으로 행동한다면 강자는 능동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고 약자가 기다린다면 강자는 창조하기 때문이다. 약자가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기다린다면 강자는 사랑할 사람을 찾는다. 약자는 사랑 받길 원하지만 강자는 사랑하길 원한다. 그리고 지금껏 약자로써의 사랑을 꿈꿔 왔지만 이제 강자로서의 사랑을 꿈꾼다. 나여, 내가 사랑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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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사랑

Know your enemy

끄적끄적 2011.04.20 13:06 Posted by 아일레프



완전경쟁이란 모델, 그리고 그 안에서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접점인 ‘가격’ 이것이 주는 안정감과 수리적 계산식이 주는 명쾌함을 부정하긴 어렵다. 하지만 ‘모델’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운 이 완전경쟁을 굳건한 사실로 받아들이면 우린 눈 앞의 진실에 대면하지 못하게 된다.

현 세계에서 완전경쟁이 ‘모델’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까닭은 그 완전경쟁이 다수의 공급자, 다수의 수요자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모델은 집단 내에서 큰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 가격에 직접 영향을 가할 수 없는 – 개인을 상정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달라서 공급자가 소수이거나 수요자가 소수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이 경우 다수인 공급자, 수요자 간에 필요 이상의 경쟁이 발생하고 이 경쟁의 법칙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적 규제 또는 권력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순수한 경제학은 오늘날 적용되기 어려우며 오히려 이 세계 내에 진정 영향을 발휘하는 경제학은 모두 정치-경제학이다.

오늘날 경쟁이란 거의 진리처럼 여겨지고 있으나 사실 경쟁은 매우 고통스럽고 지긋지긋하다. 경쟁을 즐겁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경쟁 내부가 아닌 경쟁 외부에서 경쟁을 바라보는 자들이다. 때문에 경쟁에 참여한 경쟁자들은 경쟁의 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다수의 공급자 수요자가 아니라 소수의 ‘과점’으로 가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이다.

물론 그 경쟁의 문을 통과한 자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 경쟁을 한다. 하지만 보다 덜 엄격한 경쟁의 법칙이 자리한 그 리그 내에서 그들은 서로의 법칙을 만들고 때로는 서로 간에 연대의식을 쌓아 가기도 하며 우리는 이것을 담합이라 부른다. 담합이란 경쟁자들끼리 “우리 좀 적당히 경쟁하자”라는 약속을 확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경제학에선 죄수의 딜레마를 예로 들며 이 담합이 실제로는 쉽지 않다고 말하지만 죄수의 딜레마는 절대 소통할 수 없는 분리된 공간의 죄수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곧 철저한 비협력 게임이론이라 그런 것이고 실세계에서 담합의 예는 적지 않다. 어쨋든 그들의 담합은 그들을 두 가지 결론으로 나가게 하는데 하나는 가격을 낮추지 않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들이 이미 통과한 경쟁의 문을 좁혀 잠재적인 경쟁자들의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교묘히 경쟁하고 교묘히 협력한다.

그들은 하위리그의 경쟁을 입법하는 자로서 경쟁의 법칙을 잔인하게 좁혀가면서 본인들은 사디즘적 즐거움을 누리고 일련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듯 행동하고 있다. 법은 큰 물고기는 놓치고 작은 물고기만을 잡는 그물이라 함은 여기서 기인한다.

사실이 이렇다면 어떤 리그 안에서 경쟁하는 개인은 마땅히 두개의 집단과 마주치고 힘겨루기를 해야한다. 하나는 리그 내 경쟁자들의 집단이며 또 하나는 리그 간 경쟁자들이다. 즉 우리는 알게 모르게 수평적으로는 경쟁하고 있으며, 상위 리그에 대해서는 투쟁하며, 하위 리그는 억압하고 있다.

우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리그 내 경쟁이 사회를 보다 나은 곳으로 향하게 한다며 그 가치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지만 리그 간 경쟁도 사회를 보다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사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21세기의 윤택은 리그 내 경쟁 뿐 아니라 리그 간 경쟁에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하지만 상부 리그를 향해 투쟁하는 사람들을 저들은 불온하다 하고, 빨갱이라 부르며 그 의미를 폄하하고 있다. 그들은 현 사회의 질서를 옹호하며 리그 간 투쟁을 행하는 자들의 목소리를 억제한다. 수평적 경쟁은 찬란한 ‘시장’의 이름으로 아릅답게 치장하는 한편 수직적으로 투쟁하는 자들에 대해선 매도하는 전략을 택해 하부 리그의 힘이 모여 하나의 덩어리로 향해 가는 것을 억제하며 스스로 분열하게끔 유도한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들을 도덕이란 단어를 제시하며 폄하할 생각은 없다. 사실 그들의 이런 전략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상부 리그가 하부 리그에게 행하는 전략들이 자연스럽다면 하부 리그가 상부 리그를 향해 투쟁하는 것도 자연스럽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맘 속에 뜨거운 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여, 그 불을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말자.

사회를 최대 이득과 균형으로 이끄는 것은 시장의 기능 뿐 아니라 계급간의 다툼이며, 순환적인 힘겨루기에 있다. 수평적 경쟁에 힘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직적인 싸움에 눈 돌리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우리의 적은 그들이 늘 말해왔듯이 내부가 아닌 외부에도 있다. Know your en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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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판타지를 내게 보여라. 세 얼간이

끄적끄적 2011.04.06 20:50 Posted by 아일레프

'세 얼간이'는 코미디 장르에 어울리지 않는 긴 러닝 타임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만 평한다면 내게 불만을 가질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현재 이 영화의 네이버 평점은 놀랍게도 9.45이다. 한국 영화, 헐리웃 영화도 아닌 인도영화가 9.45란 평점을 기록한 것은 아마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리뷰를 보니 감동스러웠다는 의견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영화는 코미디 영화가 그렇게 원하는 감동과 재미란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고 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난 결코 후한 점수를 주지 못하겠다. 일단 너무 단편적인 캐릭터로 일관한다. 주인공 란초는 가히 '신'급이며, 악역을 맡고 있는 캐릭터들은 너무 찌질하며 못났다. 바름과 그릇됨. 선과 악. 좋음과 나쁨. 이렇게 이분법적인 극단의 캐릭터들로 이루어진 영화는 현실을 바르게 보여주지 못한다. 맞다. 동물이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이 마법을 부리는 장면이 꼭 나와야 판타지가 아니다. 이 영화는 판타지다. 현실에선 존재하기 어렵지만, 사람들이 너무나 원하는 장면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판타지다.

그런데 판타지란것이 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내가 후한 점수를 줄 수 없는 결정적 이유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판타지가 내가 원하는 판타지가 아님을 종국에 가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장면. 판타지로 기억에 남기고 싶은 이 영화는 '성공'이란 단어를 삽입함으로 판타지의 한 가운데에 가혹한 현실을 집어 넣어버렸다. 결국 대전제는 '성공'이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것으로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교육이 결국 성공으로 가는 보다 편하고 좋은 길임을 보여주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좋아, 이것만으로는 괜찮을 수도 있다. 개개인이 판단하는 '성공'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자신만의 성공을 스스로 정의하지 못하고 성공을 곧 부와 명예로 인식 하도록 끊임없이 강요받고 있다. 이 흐름은 학교, 회사를 막론하고 종교 단체(망할…), 심지어 서점에서도 바로 목격할 수 있다. 내가 가장 짜증나는 부분은 본래의 목적을 지워버리고 "성공"을 억지로 끼워넣는 만행이다. "고전으로 리딩하라"는 전 세계 0.1%의 부자는 인문 고전을 읽고 있다고 말하며 고전 읽기의 동기부여를 위해 성공을 끌어들인다. 이건 양반이다. 책의 본 메시지를 가려버리는 책 제목과 책 날개를 버젖이 홍보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아웃라이어를 보라.) 심지어 지하철의 도인들도 더 이상 "도를 믿으세요?"라고 묻지 않는다. 이젠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라고 묻는다. 젠장. 한국은 성공에 너무 미쳐있다. 이 영화도 그것에 도달하는 방법론만 차이가 있을 뿐 그 '미침'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성공은 이 사회가 강요하는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여기서 난 감독의 상상력의 부재를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난 정말 간절히 묻고 싶다. 우리에겐 '성공'이 아닌 다른 그 무언가를 삶의 목적으로 둘 수 있는 상상력이 없는가? 좋아, 이게 없다면 다른 '성공'을 그릴 상상력이 없는가? 젠장, 란초는, 란초는 성공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다. 성공하더라도 다른 '성공' 이면 더 좋을 뻔 했다.

후.. 잠시 숨좀 고르고…

좋다. 현 자본주의 사회의 그 특성상 개개인은 자신도 모르게 '성공'을 자신의 목표로 삼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부정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를 위해 '효율성'이란 단어가 점점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한국이란 나라에선 그 효율적인 방법이란 것이 그다지 정의롭게 느껴지지 않음으로 우리가 어렸을 때 교육받아온 도덕관과 충돌하게 되고, 만약 그것에서 비롯된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면 한 개인은 어느새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극단으로 치닫으면 부당거래와 같은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 도덕과 성공이란 서로의 가치가 양갈래로 갈라져 있기에 이런 현상은 생각보다 자주 나타날 수 있다.

세상에는 불공평한 일 따위는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 말이다. 선생님도 부모님도 “노력해라, 노력하면 보답받을 거야” 라고 하지만, 말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지 않은 이유는 본인들 삶 주변에서도 비슷한 일이 잔뜩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것도 모르고 “노력하자, 노력하면 보답받지 못할 일은 없어”라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자라 버리면, 어른이 되고 나서 자기를 차고 월급을 더 많이 받는 남자와 결혼해 버린 옛 애인을 죽여서는 보스턴백에 쑤셔 넣어 내다버리는 전개가 되는 거다. -- 마야베 미유키 "우리 이웃의 범죄" 중

A는 어떤 영화에 깊은 감동을 받아 그 영화의 주인공 처럼 살기로 작정한다. A는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머리 속으로 '알이즈 웰'을 외치며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간다. 하지만 자신이 그 영화의 주인공 만큼의 재능이 없음을 알게되고, 스스로가 가는 이 길이 1등이 아니면 모두 지옥으로 떨어지는 길임을 완벽히 확인한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목숨을 끊으리라 다짐했다. -- 결코 일어나지 않아야 할 미래의 일.

이런 비극들에 대한 비판이 시스템과 사회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선가? 사회는 늘상 란초와 같은 예외 인물의 사례를 보편인양 제시하고 이 문제를 오직 개인만의 것으로 수렴시킴으로 문제는 사회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라 말한다.

"그건 당신의 잘못입니다. 체제를 탓하지 마세요" - 지그 제글러

천만에, 이것은 나의 잘못만이 아니다. 시스템과 체제를 탓하겠다. 우리에겐 필요 이상의 무거운 짐이 주어져 있다. 내가 원하지도 않은 삶의 형태로 나 스스로를 옥죄여 간것은 오직 내가 나이기 때문만은 아니요, 이 체제와 시스템에도 원인이 있다. 그럼으로 오직 개인의 '란초되기' 그것으로 '성공하기' 란 메시지를 전해오는 이 영화에 난 반대다. 이런 삶은 현실만으로 족하다. 지끔껏 만나지 못했으나 우리 모두가 속으로 꿈꿔온 다른 판타지를 내게 보여라. 다른 목적지에 불을 밝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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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탐정 김전일과 성급한 일반화.

끄적끄적 2011.03.13 12:47 Posted by 아일레프

소년 탐정 김전일을 보면 위와 비슷한 상황을 몇번 만날 수 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여러가지 수수께끼에 의해 그 사건은 미궁으로 빠진다. 그리고 김전일과 또다른 누군가가 이사건의 해결을 두고 경쟁을 펼치게 된다. 이때 먼저 해답을 얻었다며 범인을 지목하는 이는 김전일이 아닌 김전일의 경쟁자이다. 그 김전일의 경쟁자는 자신의 풀이 과정을 조리있게 설명하며 자신이 승리자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승리자인 그가 발표의 장에서 나가면 김전일의 친구 중 한명이 김전일에게 묻는다.

"김전일, 저 사실을 몰랐던 거야?"

김전일은 대답한다.

"아니. 알고 있었어. 하지만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남아있어"

...

...

...

안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현상을 그보다 적은 규칙과 도식으로 일반화하고, 추상화 한다는 것을 뜻할지도 모른다.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에서 하이젠베르크의 친구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데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즉 다양성을 일반적인 간단한 것에 귀착시키는 일, 바로 자네가 좋아하는 그리스 인식으로 말하면 '많은 것'을 '하나'에다 소급시키는 일을 우리는 '이해'하였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 볼프강 파울리

추론이라고 번역되는 deduction이란 단어에 공제, 삭제의 의미가 함께 들어있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뉴턴이나 아인슈타인등 과거의 과학자들이 위대한 이유는 이 복잡한 세상을 그 이론의 폐구간 안에서 모든 것을 명료히 설명하는 규칙과 질서를 발견했다는 것일테다. 우린 그러한 과학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이세계를 설명하고,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를 분명히 가지고 있다.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어떤 객체들의 특징을 어떻게든 정리해 우리의 언어 내에서 주어와 술어로 표현한 후, 스스로 앎을 얻었다는 확신 속에서 평안한 안식을 얻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 이해하고 싶다. 앎을 얻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일까? 우린 적은 사례들의 표본만을 가지고 전체의 규칙을 일반화하기 쉽상이다. 그런데 그 결론을 얻기까지의 과정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침착한 이성의 눈으로 바라본 설득력있고 명백한 증거들이 아니라, 의식 혹은 무의식의 저변에 깔려있는 과거 자신만의 어떤 '경험'이라는 사실을 난 부인하기 어렵다. 이 선행된 경험의 힘이 얼마나 오묘하고도 강한지, 그 경험을 뒤엎고도 남을 만한 다른 경험들이 이미 높은 자리를 차지한 선행 경험의 힘을 이겨내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배의 충격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실과 누구보다 먼저 빠르게 답을 내리려는 경쟁심리가 우리로 하여금 성급히 "~은 ~이다"라고 말하게 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게 한다.

김전일이 훌륭한 이유는 한층 더 깊은 수읽기로 남들이 보지 못한, 수수께끼 이면의 다른 수수께끼를 발견한다는 것과 그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규칙을 발견할 때까지 앎으로 부터 오는 안식의 순간을 끊임없이 지연시킨다는 점에 있다. 우린 이러한 김전일의 자세와 끈기를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가끔씩 섣불리 "~은 ~때문에 ~이다" 라고 말하기 이전에 김전일의 눈빛과 표정을 흉내내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빨리 답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답을 내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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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시간이 비는 일요일이었다. 편한 마음으로 '천재 유교수의 생활'이라는 만화책을 보았는데, 와. 소네트 83번 일화가 멋졌다. 저 위 그림에 보이는 교수와 어리버리해 보이는 학생의 일화가 담겨져 있었는데, 저 학생은 이해가 너무 느리다. 남들이 다 알고 넘어가는 걸 끙끙 붙잡고 있다. 저 학생이 자주 하는 말은 "죄송합니다. 모르겠습니다."이다. 저 교수는 이 학생을 참 많이도 혼내는데 사실은 마음 깊이 아끼고 있었다. 그 이유는 저 학생이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다.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넌 연구가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자질을 한가지 가지고 있다. 그건 자신이 진심으로 납득하지 않는한 결코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문장인가.

이와 함께 예전에 보았던 "카이스트"란 드라마의 일화가 생각났다. 보셨던 분은 알겠지만 극 중에 '만수'란 캐릭터가 나온다. 이 사람은 명색이 카이스트 대학원생인데 절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대학원생이 허구헌날 대학생인 이민우에게 질문하고 도움을 청하고 폐를 끼친다. 어느날 민우가 하도 갑갑해 교수님에게 "만수형은 도대체 어떻게 대학원에 들어간거죠?"라고 묻는다. 그러니 교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정확히 기억 나지는 않는다.)

"실험 과목이 있었어. 만수도 그 과목을 듣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학생이 하루면 끝나는 실험을 저 만수란 녀석은 1~2주가 되서 겨우 겨우 끝내는거야. 어려운 실험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진로를 잘못 선택한것은 아닐까 하고 안타까워했지. 그런데 말이야, 만수는그 과목에서 어떤 실험과 과제도 성공해내지 못한 적이 없었어. 시간이란 가치로 그를 따진다면 그는 낙제지. 하지만 그는 낙제생이 아니었어.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덕목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그는 대학원생이 되었지."

허구헌날 "좀 더 빨리, 남보다 먼저"란 구호가 항상 머릿 속에 있는 내게 시간을 무시해버림으로써 그것에 결코 패배하지 않는 저 두명은... 머랄까...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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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신부 by 신해철

끄적끄적 2010.11.19 18:35 Posted by 아일레프
---------------- 2010.11.19일 업데이트 내용 ----------------

오랜 만에 이 글을 다시 보았는데, 으음.. 뭔가 복잡한 기분이 든다. 

이 글을 썻을 때만 해도 "나의 주인"은 '신'이 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

내가 믿는 종교가 나를 노예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나의 주인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이 과연 사탄의 유혹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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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자못 충격적인 이 노래는 신해철이 에덴 동산에서 뱀이 이브를 유혹하는 것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 노래의 화자는 뱀, 사탄이고 이 노래를 듣는 이는 그가 유혹하는 이브이다.

 

노래에서 사탄은 끊임 없이 이브에게 내게로 오라고 말한다. 마음에 드는 것은 사탄이 더 이상 뻔한 방법으로 유혹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성경에 쓰여진 것처럼 영생을 얻는 다고 말하지도 않고, 달콤한 캔디 같은 말을 보태며 세상을 준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 노래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를 편안한 곳으로 데려가지 않겠다. 나를 따라오면 고통이 있을 것이다.

 

다만 그 폭풍의 시간과 고난, 시련의 시간이 지나면 너는 너 또한 알지 못하는 깊은 곳의 너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네가 진정 너일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겠다. 저 높은 곳의 그의 손을 벗어나 네가 스스로의 주인이게끔 내가 도와주겠다.

 

이 편안이란 위선으로 장식된 억압의 감옥인 에덴에서 벗어나 자유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고난의 길로 나와 함께 가자.”

 

 

그래, 이것이 바로 21세기 사탄의 유혹 방법이구나.

 

당신은 이겨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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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장

끄적끄적 2010.04.27 10:31 Posted by 아일레프

“만일 네 형제가 네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을 때에 잘못을 지적하여라. 만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네 말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다시 가거라. 그래서 네가 하는 모든 말에 두세 사람의 증인을 대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여라. 만일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려고 하면, 이방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 묶은 것은, 하늘에서도 묶여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너희가 푼 것은,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다.

 

다시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무엇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세 사람이 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어제 새 나라의 어린이처럼 너무 일찍 자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오늘 일찌감치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습니다. 일찍 일어나니 할 것도 없고 심심하기도 해서 지난주에 새길 청년회와 같이 읽어보았던 본문을 펼쳐 보았습니다.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읽어 보아도 17절의 말씀 – 이방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라는 말씀과 나중에 일곱번의 일곱번까지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도 모순되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혹시 번역상의 문제일까 싶어서 인터넷에서 다른 번역들을 찾아보았습니다.

 

NIV – “treat him as you would a pagan or a tax collector.”

KJV – “let him be unto thee as an heathen man and a publican.

 

모두 동일한 말이네요. 번역상의 문제는 없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마음은 더욱 아팠고 더욱 더 심난했습니다.

이때 방 한 구석의 유진 피터슨의 Message성경을 펼쳐보았습니다. 굉장히 놀랐습니다.

저 말을 유진 피터슨은 “confront him with the need for repentance, and offer again God's forgiving love." 이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 ‘우리가 생각하는 이방인과 예수님의 생각하는 이방인이 달랐구나!, 우리가 이방인을 대하는 방식과 예수님이 이방인을 대하는 방식이 이렇게 다르구나.’ 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 참으로 예수님은 이방인과 세리들의 친구였습니다.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말은 그들을 버려두라는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99마리의 양이라면 이방인과 세리들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었습니다.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대했던 것처럼 그를 대하라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으로도 충분히 수수께끼가 풀린 것 같아 벌써부터 마음이 강하게 울리지만 그 뒤의 구절들은 더욱 더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 묶인답니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답니다. 이 또한 굉장히 놀라운 말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형태의 메시지에 익숙해왔습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이 노했다고 생각했고 누군가가 곤경에 빠지면 하늘의 신이 벌주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즉 그들이 생각하기에 하늘에서 묶여야 땅에서 묶이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 묶인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제 현대로 시간이 흘러가 더 이상 하늘이 노해 번개가 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또 다른 “위에서 아래로”의 사고에 익숙합니다. 바로 명령의 복종입니다. 자신보다 직급이 높은 사람들의 말에 우리는 복종합니다. 그 명령이 다른 이를 해치게 하는 명령이거나 기존에 자신이 받아온 도덕 교육과 완벽히 모순되는 명령이라 할 지라도 사람들은 그 명령에 쉽사리 복종합니다.(더 궁금하신 분은 권위에의 복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자신의 결정을 상사에게 전적으로 위임하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어떤 일에 대한 결과의 책임을 자신에게 묻기보다는 상사에게 묻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행동으로 자기 자신으로 자신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사의 대리인으로서 자신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때 예수님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 묶인다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너무 빠르게 나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 말을 이렇게 바꾸어보았습니다. “땅에서 묶이면 하늘에서도 묶인다. – 땅에서 용서하면 하늘에서도 용서한다” 상하관계가 역전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땅에서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하면 하늘에서도 그가 용서되고, 하나님이 그를 사랑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이 말을 뱉으신 그 순간,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써 누군가를 용서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용서의 주체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린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 그를 용서해야 합니까?"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네가 용서하면 나도 그를 용서하겠다."

 

또한 때때로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벌 주실 텐데, 괜히 속상해 하지 말고 용서해버리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써 이러한 거짓 용서가 발 디딜 곳을 없애버리십니다. 또다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네가 용서하면 나도 그를 용서하겠다."

 

 

그 후 구절,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무엇을 구하면" 위 사실을 온전히 이해한 사람들은 이 때 무엇을 구할까요? 다음과 같이 구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우리는 그를 용서했습니다. 하나님도 용서해 주세요"

 

이와 같이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기존의 용서의 차원을 뛰어넘는 용서인 것입니다. 밀양에서 전도연이 이와 같이 기도했다면 감옥에서 그를 만나 분노의 눈물이 아닌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알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심히 자의적인 해석일 지 모르지만, 이것이 내가 믿고 싶어하는 하나님이며, 내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어떤 “교리”를 믿고 안 믿고를 가지고 천국과 지옥에 보내는 분이 아니라 우리보다 이방인을 더욱 더 사랑하시는 분, 그리고 그 사랑과 용서를 우리 스스로 주체가 되어 행하고, 그 것의 놀라움을 스스로 깨닫기 원하시는 분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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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는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아이티에서 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다.

내게 직접적인 아무런 영향도 없고, 내가 딛고 있는 내 발아래의 이 땅은 너무나도 안전하기에, 여전한 웃음을 품고 하루를 잘도 살아가고 있지만, 그 와중에 예전 리아 에서 인용한 시가 다시 생각나 함께 나눕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어떤 사람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일부이다

만일 흙 한 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나가면,

유럽은 그만큼 줄어든다

한 곶이 씻겨 나가도 마찬가지고,

그대의 친구나 그대의 영토가 씻겨 나가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줄어들게 한다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그것은 그대를 위하여 울린다

 

 

존 던, 천국으로 가는 시

 

 

시인이며 목사인 존던이 살던 영국 그때, 그리고 그곳에서는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존 던이 살던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한 사람이 전염병으로 숨을 멈출 때 마다 교회의 종을 울리게 했다고 합니다. 존 던은 그 종이 울릴 때마다 이렇게 궁금해 했겠죠. “종이 울렸구나, 누군가가 죽었나보다.” 그런데 어느날 존던 마저 전염병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병석에 누워 있던 중 그 종소리를 다시 듣게 되었습니다. 그 때 존던은 느꼈던것입니다. 저 종의 울림이 바로 자신을 위한 것 이었음을. 그리고 저 위대한 시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날 아이티에서 매우 커다란 종이 울렸습니다. 우리 또한 대륙속에 한 모래이기에, 우리는 인류속에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그 종소리는 우리들을 위한 종소리입니다.

 

잠깐 눈을 감고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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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 어떤 사회에서 오랫동안 지켜 내려와 그 사회 성원들이 널리 인정하는 질서나 풍습

Convention - the way in which sth is done that most people in a society expect and consider to be polite or the right way to do it

 

사람들은 흔히 어떤 사안이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다면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치명적인 악습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의 절반은 그런 버릇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어떤 작가는 확정된 결론은 깊은 잠에 빠진다.고 말했다.” -- J.S.밀의 자유론 중에서

 

지난 주에 읽은 저 책의 내용을 보면서 밑줄을 그으며 끄덕거렸습니다. 충분히 공감했다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란 참 우습습니다.— 나에게는 대입되지 않는 다는 자신감으로 저 교훈을 쉽게 잊어버릴 뻔 했었는데 저 글귀를 기억할 만한 일화가 생겨서 공유합니다.

 

잠깐 그 일화를 공개하기 전에 군대에서 있었던, 너무 비 합리적이라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나오는 에피소드를 말씀 드립니다. 저는 해경 출신인데 축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해경 부두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축구를 하다가 공이 바다로 가면 영영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공이 빠지지 않게 공이 나가면 빨리 뛰어서 공을 가져 와야 합니다. 그런데 공이 나갈 때마다 막내 이경이 10명이면 10명 전부 뛰어 나갔습니다. 그 광경이란 지금 상상해도 웃음이 납니다. 저 멀리서 수경이 미친 놈들아! 멍청한 놈들아! 한 명만 가면 되잖아! 한 명만 가라고!” 계속 말합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습니다. 공이 누군가의 손에 들리기 전에는 무조건 뛰어야 합니다. – 동기 중 한 명이 이것을 어겼다가 일경에게 맞았습니다군대에서만 볼 수 있는 이런 일이 굉장히 희극적인 이유는 지키는 사람도, 지키라고 하는 사람도 모두 그 관습이 불합리하고 옳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아주 열심히, 온 맘과 정성을 다해 그 관습을 지킨다는 것과, 당한 사람이 고참이 되면 그 관습의 열혈한 수호자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굉장히 재미있는 일이지요.

이 일화는 그냥 웃음을 드리려고 쓴 이야기이고 -- 재미있었나요? --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와는 멀리 동떨어질 수 있습니다. – 군대의 이야기를 현실의 예로 들기에는 그곳이 너무 멀리 있습니다. –

 

최근의 재미있는 일은 이겁니다. WPF 프로그래밍을 하던 동료 중 한 명이 첨부 프로퍼티만을 선언하는 객체는 굳이 DependencyObject를 상속받지 않아도 괜찮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에이, 그럴리가~ 무조건 DependencyObject를 상속해야 될 것 같은데라고 말했습니다. 그 동안 그렇게 써왔기 때문에 바로 그 말이 튀어나오더군요. 그런데 잠시 생각해보니, 그의 말이 옳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존 프로퍼티를 소유하는 객체가 반드시 DependencyObject를 상속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왜냐면 의존 프로퍼티의 Value 결정(상속, 스타일링, 바인딩과 연동하여)을 최종적으로 담당하고 진정한 의존 프로퍼티에 해당하는 Value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DependencyObject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SetValue, GetValue를 생각하면 됩니다.) 하지만 첨부 프로퍼티는 그 Value의 소유를 자신이 아닌 다른 DependencyObject 객체에 위임하기 때문에 첨부 프로퍼티만을 선언하는 객체는 의존 프로퍼티의 Value의 소유권을 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DependencyObject를 상속받지 않아도 잘 동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종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동료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무언가에 대해 과감히 질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질문의 힘은 과연 위대합니다. “왜 그럴까?, 정말 그래야만 하나?”라는 질문은 진실로 진실에 다가가게 해주며 그로 인해 대상의 본질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염세주의자의 냉소만큼의 가치만을 지닐 뿐이겠지요. 질문을 했으면 탐구와 실험을 통해서 결론을 내고 그 결론을 다른 이와 공유할 수 있는 용기와 풍요로운 마음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효용효율이라는 가치가 우리 삶에서 점점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함에 따라 이런 것에 대해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직접 확인해 보는 것은 멍청한 일처럼 보입니다. 확실해 보이는 특정 정보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기 보다는 자신이 모르는, 하지만 남들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다른 정보에 대해 하나 더 아는 것이 안전하고 효율적이며, 궁극적으로 그것이 나에게 더 큰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이란 생각이 자연스레 들기 때문입니다. 결국 더 많은 지식의 축적을 위해, 효율을 위해 사람들은 기존의 암묵적인 옳음에 대해서 더 이상 질문하지 않습니다. 단지 권위 있는 타인에게 의지하므로 스스로 깨우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하는 것이지요. 결국에는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마저 다른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기준에 자신을 검열하고 맞춰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빠르게 정보를 익히고, 모난 돌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둥글게 하고,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가치에 대해 공감하고, 그리고 그에 맞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은 사회에서 자신도 모르게 합의한 성공과 행복에 대한 소중한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발자로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Yes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비극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개발자로서 다가가는 장벽은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미분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적분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약간의 논리적인 생각과 가벼운 덧셈과 뺄셈만 하면 누구나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새로운 것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어떠한 능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절로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능력이 없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아무런 질문 없이 남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만으로 만족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적어도 그 생각이 어디서부터 출발했으며,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이며 그 생각이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를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해 봐야 하겠습니다. 개발자에게 있어서 자고로 코드의 Copy & Paste보다 무서운 것은 무조건 적인 생각의 Copy & Paste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문하기를 주저하지 맙시다. 그것을 시작으로 해서 효용과 효율이란 가치를 우두머리로 삼아 권위라는 공포와 무관심으로 살찌워진 게으름으로 자신도 모르게 행하는 생각의 Copy & Paste를 이제는 멈추고, 진실에 다가가고 싶은 열망으로 시작되고 열린 대화와 진정한 토론으로 움직이므로 능히 과거를 넘어서고도 남을 수 있는 더욱 더 멋진 일들을 이루어 가도록 합시다.

부디 여러분도 K가 되어 다른 이를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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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엑스의 도인

끄적끄적 2009.10.31 14:24 Posted by 아일레프
 
어느날 코엑스 길가에 한명의 처녀 도인과 아줌마 도인이 있었더라. 그 중 아줌마 도인이 지나가던 범인에게 부탁하기를
 
“부디 그대의 마음을 넓혀 가난한 자와 헐벗은 자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일에 작은 정성을 보태 주시오” 라고 하더라.

이 때 믿음이 없는 범인이 그냥 지나치려고 하다가 처녀 도인의 얼굴이 너무 아리따워 걸음을 멈추고 아줌마 도인에게 대답하기를
 
“요즘 시대가 어두워 스스로 깨우쳤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많아 내 당신을 믿지 못하겠으니 부디 도인 증명서 하나만 보여주시오” 라고 말하였더라.
 
이에 처녀 도인이 냉큼 자신의 곱디 고운 손으로 지갑에 손을 넣어 도인 증명서를 보여주려 하자 아줌마 도인이 그 손을 막아서며 범인에게 말하길
 
“이 믿음이 없는 자여, 우리가 진정 도인이건 아니건 그대의 작은 정성을 더해 가난한 사람을 구하고 나아가 그대의 하늘에 보물을 더할 수 있거늘, 그대의 믿음이 없어 가난한 자도 돕지 못하고 그대의 하늘에 때묻은 오점만 생기게 되었도다.” 라고 말하며 고개를 돌려 아리따운 처녀 도인과 함께 그 자리를 냉큼 떠나가더라.
 
이에 범인이 잠시 생각하다가 홀로 되뇌이기를
 
“이놈의 이기적인 도인을 보았나, 당신이 도인이 맞다면 도인 증명서하나 보여줌으로써 가난한 이도 도울 수 있고 다른 이가 자신을 통해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있거늘, 자신의 헛된 오만으로 하늘의 풍요를 줄였도다!”
 
이는 도인이라는 자의 선을 행하는 목적이 오직 자기 자신의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에 있기 때문이라.
오늘날 선을 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행위가 이와 같으니 어찌 안타까움을 금할 수 있으랴.
 대저 땅에도 구획이 없고 하늘을 나르는 구름에도 자신만의 집이 없거늘, 만물의 영장 인간만이 땅의 소유를 정하더니 이젠 그 소유의 영역을 하늘에까지 넓혀, 모든 아름다움의 가치를 바닥으로 끌어 내리고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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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도인

라인홀트 니버의 한마디

끄적끄적 2009.06.10 17:42 Posted by 아일레프

우리의 삶 속에서 성취 될 수 있는 가치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 받아야 한다.


역사의 정황속에서 완전한 의미를 드러낸 진실이나 아름다움, 선함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아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고결하더라도 혼자의 힘으로 환성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으로 구원 받아야 한다.






-- 당신의 말에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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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2009.02.26 22:52 Posted by 아일레프

by 민영
꽤 많이 걸어왔어.
이제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저기 지평선 위에 늘어진
키 큰 나무들,
그 밑에 모여 앉은 작은 집들.

보이지?
발갛게 타오르는 눈부신 석양,
그리로 가고 있는 중이야.

잘 있어!

 - 살다보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가슴을 움직이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랜만에 마음을 움직이는 시.
그런데 솔직히 무슨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잘 있어.라는 말이 그냥 좋다.
그리고 나도 님과 함께 석양이 보이는 곳으로,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가고 싶다.
그런데 님은 "싫어"라고 말할 것 같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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