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8장

끄적끄적 2010.04.27 10:31 Posted by 아일레프

“만일 네 형제가 네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을 때에 잘못을 지적하여라. 만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네 말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다시 가거라. 그래서 네가 하는 모든 말에 두세 사람의 증인을 대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여라. 만일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려고 하면, 이방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 묶은 것은, 하늘에서도 묶여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너희가 푼 것은,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다.

 

다시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무엇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세 사람이 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어제 새 나라의 어린이처럼 너무 일찍 자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오늘 일찌감치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습니다. 일찍 일어나니 할 것도 없고 심심하기도 해서 지난주에 새길 청년회와 같이 읽어보았던 본문을 펼쳐 보았습니다.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읽어 보아도 17절의 말씀 – 이방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라는 말씀과 나중에 일곱번의 일곱번까지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도 모순되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혹시 번역상의 문제일까 싶어서 인터넷에서 다른 번역들을 찾아보았습니다.

 

NIV – “treat him as you would a pagan or a tax collector.”

KJV – “let him be unto thee as an heathen man and a publican.

 

모두 동일한 말이네요. 번역상의 문제는 없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마음은 더욱 아팠고 더욱 더 심난했습니다.

이때 방 한 구석의 유진 피터슨의 Message성경을 펼쳐보았습니다. 굉장히 놀랐습니다.

저 말을 유진 피터슨은 “confront him with the need for repentance, and offer again God's forgiving love." 이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 ‘우리가 생각하는 이방인과 예수님의 생각하는 이방인이 달랐구나!, 우리가 이방인을 대하는 방식과 예수님이 이방인을 대하는 방식이 이렇게 다르구나.’ 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 참으로 예수님은 이방인과 세리들의 친구였습니다.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말은 그들을 버려두라는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99마리의 양이라면 이방인과 세리들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었습니다.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대했던 것처럼 그를 대하라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으로도 충분히 수수께끼가 풀린 것 같아 벌써부터 마음이 강하게 울리지만 그 뒤의 구절들은 더욱 더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 묶인답니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답니다. 이 또한 굉장히 놀라운 말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형태의 메시지에 익숙해왔습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이 노했다고 생각했고 누군가가 곤경에 빠지면 하늘의 신이 벌주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즉 그들이 생각하기에 하늘에서 묶여야 땅에서 묶이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 묶인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제 현대로 시간이 흘러가 더 이상 하늘이 노해 번개가 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또 다른 “위에서 아래로”의 사고에 익숙합니다. 바로 명령의 복종입니다. 자신보다 직급이 높은 사람들의 말에 우리는 복종합니다. 그 명령이 다른 이를 해치게 하는 명령이거나 기존에 자신이 받아온 도덕 교육과 완벽히 모순되는 명령이라 할 지라도 사람들은 그 명령에 쉽사리 복종합니다.(더 궁금하신 분은 권위에의 복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자신의 결정을 상사에게 전적으로 위임하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어떤 일에 대한 결과의 책임을 자신에게 묻기보다는 상사에게 묻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행동으로 자기 자신으로 자신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사의 대리인으로서 자신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때 예수님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 묶인다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너무 빠르게 나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 말을 이렇게 바꾸어보았습니다. “땅에서 묶이면 하늘에서도 묶인다. – 땅에서 용서하면 하늘에서도 용서한다” 상하관계가 역전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땅에서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하면 하늘에서도 그가 용서되고, 하나님이 그를 사랑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이 말을 뱉으신 그 순간,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써 누군가를 용서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용서의 주체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린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 그를 용서해야 합니까?"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네가 용서하면 나도 그를 용서하겠다."

 

또한 때때로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벌 주실 텐데, 괜히 속상해 하지 말고 용서해버리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써 이러한 거짓 용서가 발 디딜 곳을 없애버리십니다. 또다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네가 용서하면 나도 그를 용서하겠다."

 

 

그 후 구절,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무엇을 구하면" 위 사실을 온전히 이해한 사람들은 이 때 무엇을 구할까요? 다음과 같이 구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우리는 그를 용서했습니다. 하나님도 용서해 주세요"

 

이와 같이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기존의 용서의 차원을 뛰어넘는 용서인 것입니다. 밀양에서 전도연이 이와 같이 기도했다면 감옥에서 그를 만나 분노의 눈물이 아닌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알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심히 자의적인 해석일 지 모르지만, 이것이 내가 믿고 싶어하는 하나님이며, 내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어떤 “교리”를 믿고 안 믿고를 가지고 천국과 지옥에 보내는 분이 아니라 우리보다 이방인을 더욱 더 사랑하시는 분, 그리고 그 사랑과 용서를 우리 스스로 주체가 되어 행하고, 그 것의 놀라움을 스스로 깨닫기 원하시는 분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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